
평양부, 삼조선 인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기술하고 있으며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왕건이 세운 고려 시기에도 이 땅을 지켰지만 원종10년(1269)에 영기관,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 땅과 함께 몽골에 투항했으며 충렬왕 때에 이 땅을 원나라로부터 다시 되돌려 받았다는 것이다. 서경이라고 부르던 평양을 원나라로부터 환수(還收)하여 서경유수관으로 다시 회복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의 서경이란 산서성에 있던 고구려의 평양성을 서경이라 하였다. 마침내 홍건적의 침입으로 1359년 12월 고려의 서경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김견명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건국과 도읍지 그리고 도읍지를 옮긴 기사는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다.
제6장 2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검단군이 삼한을 두었으며, 마한은 천일(天一)인 우현왕 변한은 지일(地一)인 좌현왕으로 각각 삼아 진한인 태일(太一) 단군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다. 왕검단군이 평양(임분)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한 다음 후에 새로운 땅인 아사달로 도읍을 옮긴 곳의 지명이 바로 태원(太原)으로 태일인 단군 자신의 도읍지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태원(太原)이란 ‘태일이 도읍한 근원이 되는 곳’이란 뜻이다.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향, 원곡(하간), 왕검의 산인 왕옥산, 첫 도읍지인 평양(임분), 아사달인 백악산과 태원, 삭주 등을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그림 25>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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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강역 연구> - 제69부
VIII. 맺음말
제1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의 영토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주(九州)의 위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주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사료는 <상서/우공>, <여씨춘추/유시람>, <회남자/지형훈>, 그리고 <주례/직방씨> 모두 4종이 있다.
이들 문헌사료들을 자세히 검토, 조사, 비교, 분석, 교차확인 해본 바 경도 110도와 위도 35에서 황하가 굴곡(屈曲)하는 산서성(山西省) 남부와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河內)를 기주(冀州), 유주(幽州), 요서(遼西), 동북(東北)이라고 지칭하였음을 확인하고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동북, 기주, 유주, 요서(군), 요동, 하동은 반드시 황하와 인접한 지역이여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학계나 재야에서 주장해온 지금의 하북성, 요녕성, 한반도는 동북도 아니고 기주도 아니며 유주도 아닐뿐더러 요서(군)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고증된 것이다.

<한서/지리지>와 <후한서>에 유주에는 요서군을 포함하여 상곡군, 북평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어양군 7개의 군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어 낙랑군(樂浪郡)은 유주인 산서성 남부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서/지리지>에 “요서군은 진(秦)나라 때 설치한 것으로 유주에 속하며 영지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고 함으로 산서성 남서부가 고죽국(孤竹國)임을 확인하였다. <설문해자>는 “수양산(首陽山)이 요서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오늘날의 중조산(中條山)이 수양산이라고 당나라의 지리서인 <원화군현도지>와 <괄지지>가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일부 역사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하북성에 있다는 수양산은 허구임을 고증하였다.
<관자>는 “요동(遼東)에 천연 소금이 산출되는 염지가 있다”고 한 사실을 산서성 남부에 해지라는 이름의 천연염지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동부, 기주, 유주, 요서군, 고죽국, 수양산, 하동, 요동은 모두 황하와 인접한 지금의 산서성 남부를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수경주/십삼주지>에는 “패수(浿水)가 낙랑군 루방현을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에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에 있고, 루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패수가 그 남쪽에서 나와 루방을 지난다. 옛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 서쪽에 있는 조선까지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패수는 반드시 황하로 주입되는 하천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 하천은 지금의 망하(蟒河)라고 부르는 강뿐이다.
<명일통지>, <대청일통지>, <대원대일통지>, <산동통지> 등으로부터 패수는 산서성 남부에 있는 왕옥산(王屋山)에서 발원하는 하천이라는 것과 패수를 연수, 제수, 추수, 격수, 취수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하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패수가 발원하는 왕옥산이 바로 왕검단군의 산임을 밝혔다.
단군조선의 핵심 영토를 밝힐 수 있는 1차사료는 <吳越春秋(오월춘추)>와 <路史(로사)>인데 <로사>에 “주나라 무왕 시기에 단백달(檀伯達)이라 있었는데 단구단성이며 옛 관단이다. 단구는 지금의 례연(隷兗)으로 단향(壇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나라 무왕(1046-1043BC) 시기까지도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백달 일명 단구단성인 단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였다. 례는 산서성 남부를 나타내며 연(兗)은 연주(兗州)로 “황하와 제수(연수, 패수, 예수) 사이”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왕검단군의 고향인 단향은 산서성 남부 지금의 왕옥산 남부, 황하 북부, 패수의 서쪽 지역임을 밝혔다.

<오월춘추>에서 왕검단군의 산인 왕옥산으로 부루산, 부부산, 부우산, 부함산(불함산), 방산 등으로 지칭했음을 확인하였다. 왕옥산에서 발원하는 패수, 연수, 제수, 추수, 격수 등을 예수(濊水)라고 하였음을 <기보통지>를 근거로 확인하였으며 예(濊)는 조선땅이라고 <태평환우기>와 <통전>이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란 천연하천으로 인하여 예맥조선이란 이름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읍(濊邑) 즉 예(濊)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산서성 남부 임분시인 평양(平壤)을 뜻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공자는 하남성에 있던 노(魯)나라에서 황하를 건너 산서성 남부에 위치한 구이(九夷)의 나라 단군조선에 가서 살고싶어 했다는 기록을 <한서>와 <서경>에서 고증할 수 있었다.
예(濊)에서 예맥, 예맥조선이 나타나고 조선에서 주신(州愼), 숙신(肅愼), 식신(息愼), 직신(稷愼) 등의 이름이 생겼음을 <오월춘추>를 근거로 확인하였다.
BC2241년에 천하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삼한의 도성은 모두 산서성 남부에 위치했으며 평양(임분)이 진한(진조선), 왕험성(조양진)이 마한(막조선)이며 왕검성(원곡)이 변한(번조선)이라 하여 각자의 자치 영토를 통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정통국으로 <수서>, <구당서>, <신당서>에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나라가 여기에 기자를 봉했으며 요동을 통솔했다”고 기록하였으며 <명사>에는 “고구려가 평양에 자리잡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고죽국이 있었던 산서성을 고구려가 그 땅을 차지하였으며 평양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은 일반명사가 아니고 고유명사이다.
조선성 또는 조선발성이 노룡(盧龍)에 있다고 하였으며 노룡은 산서성 남서부 유수(난하)와 현수가 만나는 곳임을 확인하였다. 황하변의 조양진에 조선성이 있었고 이곳을 험독(險瀆)이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양진에 있는 조선성이 왕험성이며 마한(막조선)의 도성이기도 하다.
왕검성은 변한(번조선)의 도성으로 산서성 남동부 원곡이다. 임분 평양에 도읍한 왕검단군은 진한(진조선)의 임금으로 마한의 우현왕과 변한의 좌현왕의 보좌를 받았다.
1차사료와 문헌자료를 통하여 밝힌 단군조선의 중심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이며 단군조선의 강역은 섬서성 일부와 하남성 일부를 제외한 아시아 전 지역이었음을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문헌사료에 근거하여 최초로 단군조선의 강역을 고증하였음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기존 왜곡된 통설을 즉시 폐기(廢棄)할 것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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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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