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방문을 마치고 개성 가는길에 선죽교를 들렀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잠깐이라도 방문하자는 부탁에 김선생은 선선히 응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심복에 의해 철퇴를 맞고 절명한 선죽교, 돌다리에 핏자국같은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 하다. 본래 이름은 선지교였지만 피흘린 곳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하여 선죽교가 되었다. 정몽주는 한때 이성계에 감화되어 위화도 회군에 찬동하는 등 같은 길을 걷기도 했지만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한 온건개혁론자였다.
당대의 위대한 성리학자이자 고려에 충절을 지키려 한 그를 제거하는 움직임을 이성계는 거부했지만 이방원은 암살을 감행했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지만 만약 정몽주가 위화도회군에 반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성계의 쿠데타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원을 호령한 고구려의 기개를 되살려 좀 더 나은 역사를 갖게 되지는 않았을까.
정몽주가 충절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훗날 왕이 된 이방원(태종)의 정치적 판단 덕분이었다. 그는 정도전 등 급진파들을 억누르기 위해 정몽주 사후에 벼슬을 책봉하고 복권을 시켰다.
고려성균관은 서기 992년 세워진 국자감의 후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이다. 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대학의 경우, 조선시대 고려 성균관의 후신으로 세워졌다. 재미있는 것은 명륜동 성균관 대학 캠퍼스에 수령 600여년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고려 성균관에 갔더니 수령 1천년의 은행나무가있었다. 그 은행나무 옆엔 수령 600년의 느티나무도 있었다. 이들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북한의 국가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1천년을 넘는 장구한 세월을 넘는 역사유적지에 오니 감개무량했다.
성균관의 18채 건물 중 대성전, 동무, 서무, 계성사 4개 건물은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고려시대의 각종 문화재 약 1만여점을 소장, 1천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성균관의 대학기능은 인근 개성단과대학이 고려성균관으로 개칭되면서 경공업분야의 종합대학이 되었다. 현재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과 못지 않은 명문대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태조왕건릉이 있는 마을은 주민의 절반이 왕씨로 왕씨성 집성촌이라고 한다. 왕건릉은 상당히 크고 웅장했다. 아름다운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조경도 인상적이다. 북에서 소나무는 나라나무다. 평양의 국가선물관에 갔을 때도 주변에 아름다운 소나무 조경이 잘 돼 있는걸 볼 수 있었다
왕건릉 경내엔 태조 왕건을 기리는 사당이 따로 있는데 이곳에 왕건의 초상화(어진)가 걸려져 눈길을 끌었다. 초상화가 만들어진 배경이 흥미롭다. 해설 강사에 따르면 왕건 가문의 후손 종손이 대대로 간직하던 족보가 있었는데 한국전쟁후 김일성주석에 의해 손상된 왕건릉을 대대적으로 복구한 것에 감격해 족보를 선물로 증정했다고 한다. 그 족보에 왕건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왕씨성 사람들은 그 무렵까지만 해도 조선을 건국한 이씨 성과는 대대로 원수여서 혼인도 맺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후 왕씨성 사람들이 집단으로 학살되고 큰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많은 왕씨 성 사람들이 전씨 옥씨 등 비슷한 한자로 바꾸거나 숨어 살았다. 600여년 세월이 무색하게 씻기지 않은 원한의 감정은 태조왕건릉이 화려하게 복원된후 풀렸다, 해설강사는 “이젠 왕씨성과 이씨성 후손들이 혼인도 맺으며 화합하며 잘 살고 있다”며 미소짓는다.
관람을 마치고 왕건릉 바로 옆에 있는 야외테이블로 옮겼다. 11월 중순이었지만 아직도 고운 색을 잃지 않은 빨간 단풍나무를 감상하며 첫 야외식사를 하게 되었다. 평양의 삼선암 식당에서 주문한 도시락을 펴고 서울에서 가져온 오뚜기 컵라면을 꺼냈다. 안내 김선생과 운전사 홍선생도 함께 어울린 늦가을의 피크닉이다.
“남북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함께 먹으니 ‘통일 런치’가 되었네요.”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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