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전하는 뉴스는 보통 출입처 순례(巡禮)를 통한 취재와 보도자료, 제보 등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도 있듯이 특종이나 단독보도는 행운도 작용하지만 기자의 성실함과 악착같은 근성의 결실입니다.
때로는 휴지통에 갈갈이 찢어버린 문서 등을 슬쩍 주워 퍼즐 맞추듯 특종을 잡기도 합니다. 벽이나 문틈에 귀를 대고 엿듣는 속칭 ‘벽치기’도 그리 보기좋은 모양은 아니지만 속보경쟁에 매달리는 기자들로선 불가피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도청(盜聽)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건다해도 용인될 수 없는 범죄행위라 하겠습니다.
지난 6월 24일 KBS 수신료 인상과 관련, 국회 문방위 전체회의에서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전날 비공개로 진행된 민주당 최고위원 문방위원 연석회의 발언이 담긴 녹취록(錄取錄)을 공개하는 놀랄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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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교 의원은 이날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민주당의 KBS 수신료 인상합의 파기(破棄)를 비난하면서 7쪽의 문서를 꺼내들고 “이것은 틀림없는 발언록, 녹취록이다. 그냥 몇줄만 읽어드리겠다..”며 녹취록의 일부를 낭독했습니다.
이를 들은 민주당 인사들은 경악(驚愕)했습니다. 자신들의 발언이 토씨하나 안틀리게 담겨 있었기때문입니다. 국회 민주당 대표실에서 비공개로 열린 연석회의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도청당해 녹취록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민주당은 즉각 “제1야당 민주당 당대표실을 도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국회에 대한 도전”이라며 “한나라당 스스로 도청했는지, 도청내용을 녹취한 기록을 어디서 누구로부터 입수했는지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한선교 의원은 이것이 문제가 되자 “내 측근이 민주당에서 흘러나온 메모지를 토대로 정리한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읽은 내용 중엔 “여기에서 보면 ‘24일, 28일날도 계속하고, 28일날은 내가 보기에, 28일날은 지금부터 잘..’ 이라고 있습니다. 한 줄의 문장에 28일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올만큼 정리되지 않은 걸 보면 한 의원이 전날 국회에서 주장한대로 육성을 그대로 옮긴 녹취록이 명백한 것으로 보입니다.
녹취록을 소개하고 “이것이 거짓이라면 제가 책임을 지겠다”던 한 의원은 뒤늦게 “녹취록이라고 말한 것은 실수이고 발언록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설사 발언록이라 하더라도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민주당 연석회의는 완전히 비공개회의였고 내부적으로 발언록을 만든 적이 없기때문입니다.
민주당에서 흘러나온 메모지를 토대로 한 발언록이 마치 실황중계하듯 완벽하게 정리됐으니 귀신도 놀랄 솜씨라고 칭송을 보내야할까요.
민주당은 한선교 의원을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경찰에 고발했지만 바로 다음날인 2일 그는 경찰의 출석 요구를 무시하고 해외로 출국했습니다. 박희태 국회의장을 따라 발트3국 및 덴마크를 방문 수행하는 의원단의 일원이라는군요.
누구보다 법을 준수해야할 국회의원이 ‘국회 도청’이라는 전대미문의 의혹을 일으켜놓고 한가롭게 외유를 떠나는 모습, 또한 문제의 당사자를 비호(庇護)하듯 데려가는 국회의장의 모습을 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담한 분노를 느낍니다.
설마하니 한 의원이 열흘간의 일정을 마치고도 계속 해외를 유랑하지는 않겠지만 시간을 끌다보면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는 대형사건이 터질 수도 있고 관심의 수위가 줄어들지 않겠느냐는 얄팍한 꼼수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절대로 유야무야(有耶無耶)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부 정치권의 의도대로 묻히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기때문입니다. 민주당은 이 사건의 배후에 KBS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KBS는 공식적으로 “민주당이 주장하는 식의 도청행위를 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지만 한 간부는 “우리 기자 여럿이 취재했으며 그 과정에 귀대기(벽치기)를 할 수도 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조사결과 벽에다 귀를 대도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시 KBS 기자중에 70년대 인기드라마 ‘소머즈(Bionic Woman)’의 특수 귀라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까지의 정황(情況)으로 미뤄 이번 사건은 수신료인상의 이해당사자인 KBS가 반대자인 민주당의 입장을 도청한 후 녹취록을 우군인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에 전달했는데, 한선교 의원이 솜씨없이 공개하는 엄청난 ‘오바’를 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한 시나리오입니다.
그렇다면 한 의원은 불법문건을 전달받은 부도덕한 짓을 했고 이를 거침없이 공개하고 파문이 일자 문건을 민주당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덮어 씌우고 멋대로 출국하는 무소불위의 국회의원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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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KBS입니다. 만일 KBS의 기자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그들은 언론인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고 그 윗선에 배후가 있다면 KBS는 더 이상 공영방송일 수 없으며 엄청난 국민적 지탄(指彈)을 받을 것입니다.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은 KBS 일부 기자들로부터 내년 총선에서 좋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한낱 조폭적 행태나 보이는 이해집단의 사병(私兵)에 불과한 존재들일 것입니다.
KBS는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는 국민의 방송입니다. 방송의 공정성 확보와 선정성 배제를 위해 수신료를 인상해야 한다구요? 그대들이 언론인으로서 본분을 잃지 않는 댓가로 핍박(逼迫)을 받고 끼니를 걱정하게 된다면 국민들이 울타리가 되어 십시일반(十匙一飯) 성금이라도 걷을 것입니다.
미국에선 야당의 선거본부 도청을 시도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현직 대통령이 탄핵(彈劾)을 받아 사임했습니다. 만일 미국 국회에서 공영방송 기자들이 민주당 대표실 도청을 한후 그 자료를 공화당에 넘겨주고 국회의원이 내용을 공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정치미개국, 언론후진국 한국의 상황을 대입시키는 것 자체가 블랙코미디이겠지요.
KBS 기자들은 이번 도청 의혹을 모른척 외면할게 아니라 스스로 앞장서서 한 점 의혹이 없도록 파헤쳐야 할 것입니다. KBS 프로듀서이기도 한 이강택 전국언론노조위원장의 오마이뉴스 인터뷰를 되새기며 말입니다
“국민에게 죄송하고 참담합니다..사실이라는 전제로 지금 도청사안은 그동안 의원 겁박(劫迫) 행태나 갖가지 기자로비 행태 연장선에 있는 극단적 행태에요. 그동안 공영방송의 본분을 망각하고 백선엽특집 등 특정집단의 선전도구화되는데 무감각해지고 정권의 방송장악 행위들과 온갖 징계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은게 배경에 깔려 있어요. 결국 자사이기주의와 맞물려 극단으로 간거죠. 이대로 공영방송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서 수신료 인상을 요구한다는건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거에요. (수신료 관련) 토론을 급조(急造)한 것도 눈앞의 경제이해 때문에 공적 책무를 도외시한거죠. 이 모든게 KBS가 근본적인 수술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방증(傍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