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열 번째 광복절을 맞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팔월은 광복의 달입니다. 일제 압정(壓政) 35년 치하를 벗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하는 기쁨의 달입니다. 그러나 8월 15일 광복일은 우리 민족에게 진정한 해방의 날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의 사슬에 얽매여 조국 강토가 남북으로 나뉘는 분단역사의 출발일이 되었으니까요.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가요. 제국주의 일본에 짓밟혀 신음하던 한민족은 6.25 동란(動亂)으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처절한 비극을 겪는데 욱일전범기를 내세운채
아시아 전역에서 물경 2천여만명을 살육(殺戮)한 일본은 ‘한국전쟁’덕에 전범국의 처단을 받지 않고 경제대국의 기틀을 마련했으니 말입니다.
따지고보면 일본의 부(富)는 우리 한민족이 흘린 피의 댓가인데 박정희정권은 온 국민이 반대하는 한일굴욕외교를 통해
청구권과 차관으로 각각 3억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과거 역사를 묻어버렸습니다.
박정희정권이 한일국교정상화 방침을 공론화하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학생데모대가 중앙청에 몰려가고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는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지요. 이른바 ‘6.3사태’입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 기본조약’이 조인(調印)되고 7월 14일 여당인 공화당의원들이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조약과 제협정 및 그 부속문서의 비준동의안’을 단독으로 국회에 상정(上程)하자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61명은 의원직사퇴서를 제출했습니다. 결국
8월 14일 야당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이 의결됐지요. 따지고보면 한일협정은 국민의 뜻이 아니라 박정희와 여당의원들의 의지였고
또다른 날치기통과였을 따름입니다.
이완용이 나라 팔아먹을 때에도 법적 절차는 밟았으니 60년전 희대의 매국노가 조선왕실을 꼭두각시로 놓고 벌인 짓이나
박정희 정권의 국민무시나 오십보백보 아닌가요. 목전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국교 회복을 서두른 나머지 한일간 조약엔 일본의 침략 사실 인정과 가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선행되지 않았고, 청구권문제,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 등은 굴욕적인 양보로 일관했습니다.
죄진 놈이 큰소리 치는듯한 이상한 조약을 하는 판국에 어디 감히 위안부의 ‘위’짜라도 꺼냈겠습니까. 오늘날 일본이 수많은
우리 국보와 보물들을 움켜쥐고 위안부문제 등 과거 역사를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박정희정권의 이같은 원죄(原罪)에서 출발합니다.
위안부 문제가 최초로 공론화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2년전인 1991년 8월 14일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20여만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신하여 ‘위안부’의 참혹한 역사를 증언하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는 꽃다운 16세의 나이에 중국에 있는 일제국주의 부대에 끌려가 낮에는 중노동을, 밤에는 일본군인들을
상대하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5개월 이상하다 탈출했다고 합니다.
탈출을 도와준 남성과 혼인하여 1남1녀를 두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할머니 혼자만 살아남았습니다. 결코 남들에게 말
할 수 없는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할머니가 모진 결심을 하고 세상에 나선 것은 일본의 뻔뻔스러운 행태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에 분노한 할머니는 당신의 아픈 과거를 더 이상 가슴에 묻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20만 위안부 피해여성들의 명예가 다소나마 회복되고 일본의 잔학한 위안부 만행이 전 세계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6년뒤인 1997년 김학순 할머니는 향년 73세로 별세하였습니다. 할머니가 공개증언한 8월 14일은 ‘세계
위안부의 날’로 기념되어지고 오늘날 공식적인 유엔 기념일로 만들기 위한 캠페인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일본이 위안부문제에 대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미하원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되면서부터입니다. 그전까지
한국 등 피해당사국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눈 하나 깜짝 않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연방하원에서 만장일치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된 것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무슨 일이든 미국에서 일어나면 큰 뉴스가
되기때문입니다. 이를 감지한 일본이 하원결의안을 좌절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위안부결의안은
양심적인 ‘일본계’ 정치인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을 비롯한 뜻있는 이들의 노력이 낳은 결실입니다.
이후에도 뉴욕 뉴저지 캘리포니아 등 주의회와 카운티, 시정부 등에서 위안부결의안이 통과되고 기림비가 뉴저지 팰리세이즈팍
등 여러 지역에서 건립되기 시작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일본이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는 진정한 사과를 하고 있지 않기때문입니다. 일본이 역사를 부인하고 피해자들을
매도하기에 그들의 맹성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끊임없이 통과되고 기림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얼마전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서 해외최초의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될 때 LA주재 일본총영사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궤변을
늘어놓아 한인사회를 격분케 했습니다.
준 니이미 일본총영사의 기고문은 한마디로 “일본은 위안부 문제 등 과거역사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끝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보도를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준 니이미 일본총영사는 ‘일본은 어떻게 배상했나(How Japan has
made Amends)’라는 기고문을 통해 일본이 과거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완전하게 이행했다고 주장했다.
준 총영사는 “일본이 2차대전의 잔혹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희생자에 대한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일본은 많은 나라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면서 “1995년 당시 무라야마 수상이 깊은
후회(deep remorse)를 표했고, 이같은 입장은 현 아베 신조 정권을 포함, 역대 정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관련 국가들에 전쟁 피해를 완전하게 배상하기 위해 일본은 평화조약에 의거,
보상을 했으며 개인들이 제기한 송사도 해결했다”고 말한데 이어 독일의 나치범죄에 대한 배상 노력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했다.
준 총영사는 “국가간의 평화조약에 따라 배상을 하는 것은 국제규범이다. 독일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해 배상을 한 것은 전후 동서독으로 갈려 있어서 평화조약에 서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독일정부의 진심어린 참회와
배상노력을 폄하했다.
그는 “독일이 전쟁희생자들에 성의껏 대우하는 것은 존경할만하지만 일본은 전후 어려운
경제에도 불구하고 배상의 선의를 베풀었다. 1956년 필리핀에 5억5천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했는데 이는 일본 정부 예산의 18.2%에
달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엄청난 특수속에 경제발전의 기초를 닦았음에도 “전후 어려운
경제상황”이라고 허언을 늘어놓은 것이다.
.
그는 한술 더떠 “나아가 2차대전 위안부들의 구조를 위해 일본은 진심어린 사과를 했고
정부와 국민들의 노력으로 아시아여성기금(AWF)을 설립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기금을 통해 일본은 보상금(atonement money)을 옛
위안부들에게 제공했으며 의료지원과 복지혜택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주장, 일본이 공식 사과와 배상을 회피해 반발을 불러일으킨 사실을 교묘히
물타기했다...>
기사에서 확인되듯 일본이 ‘공식 사과’랍시고 처음 한 것이 1995년 무라야마의 ‘깊은 후회(deep
remorse)’입니다.
그 알량한 무라야마의 사과도 김학순 할머니가 공개증언하고 4년이나 지난 후에 비난이 거세지자 마지못해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까진 좋습니다.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의 공식사과였다면 그러한 기조가 바뀌어선 안되고 정부차원의 배상이 곧바로 이행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됐습니까. 일본의 우익정치인들이 위안부역사의 진실을 인정합니까? 하시모토 도루같은 '한심나까무라'들은
걸핏하면 위안부를 매춘부로 매도(罵倒)하고 위안부동원에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적이 없다는 거짓을 늘어놓지 않습니까.
청맹과니 일본에게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당신들이 정부차원에서 공식사과했다면 적어도 공직자들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와선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라야마는 무라야마고 나까무라는 나까무라다’, 이건가요? 과거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나서 다른 수상이 딴소리를 한 적이 있나요? 독일의 정치인중 한명이라도 나치범죄를 옹호 비슷하게라도 하는
망언을 늘어놓은 적이 있냐 말입니다.
일본은 우파정치인들이 정기적인 망언(妄言)을 스테레오로 늘어놓고 있습니다. 아베는 2007년 처음 총리가 됐을 때부터
위안부문제를 부인했지요. 미국이 정색을 하자 눈치를 보면서 자기도 위안부역사는 잘못된거라고 생각하고 미안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상대가
위안부피해할머니도, 한국정부도 아닌 미국의 부시대통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베는 지난해말 두 번째 총리가 되기 전에도 위안부역사를 부정해서 또한번 거센 논란을 일으켰지요. 현실이 이러한데
“일본은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완전히 이행했다”는 헛소리를 미국 언론에 기고(寄稿)하는 일본총영사의 뻔뻔함에는 부처님도 돌아앉을
판국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2001년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위안부피해자들에게 보냈다는 사과 편지가
영문으로 번역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편지엔 위안부피해자들에게 충심으로 사과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고 써
있습니다.
이 편지를 놓고 일본의 한 기자는 "일본 총리가 이렇게 사과했는데 왜 한국언론은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과연 그랬나요? 고이즈미가 사과편지를 보낸 사실은 한국언론에 당연히 보도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어떻게 했습니까. 일본정부가 공식 배상 절차를 밟았나요? 그냥 말뿐이었습니다. 고이즈미 뒤로도 인두껍을 쓴
제국주의 후예들이 헛소리와 망언 종합선물세트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데 어느 누가 일본이 사과했다고 인정하겠습니까.
저는 일본이 외무성 홈페이지에 고이즈미의 11년전 편지를 올려 놓은 것이 저의(底意)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등
제3자에게 “이렇게 일본 총리가 진심으로 사과를 했는데 한국은 걸핏하면 사과하라고 어거지를 쓴다”고 사실을 호도하기 위한 목적인게지요. 그게
아니라면 고이즈미의 외무성은 필시 아베를 위한 '아바타'임에 분명합니다.
일본총영사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배상을 했다는 것도 헛소리입니다. 당시 한국의 위안부피해할머니들은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공식사과와 배상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공식사과를 회피하고 얼렁뚱땅 민간단체를 통해 위로금을 주겠다는 수작을 부리자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령(高齡)의 할머니들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한차례 모이는 수요집회를 20년 넘게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꽃다운 소녀들을 강제납치해 순결(純潔)을 유린(蹂躪)하고 짐승우리같은 곳에서 수년간 짓밟아 비참하게 죽이거나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게 한 죄악은 일본 국민 전체가 석고대죄해도 모자를 것입니다. 대체 그들은 훗날 죄값을 어떻게 치르려고 두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을까요.
“일본아, 그따위 썩은 사과는 너나 먹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