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습니다.”
2007년 7월이었습니다. 당시 만 64세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을 맨해튼에서 만났을 때 아직 한국을 가본 적이 없다면서 “오래전 일본에 들른 것이 한국에 가장 가깝게 간 것”이라고 부드럽게 농담을 섞어 말한 것이 기억에 납니다.

아다시피 그는 2004년 민주당의 대선후보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소수계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의 대선주자였으니 뉴욕 뉴저지 일대의 한인 유권자들은 대부분 그를 지지했습니다. 그뿐인가요. 당시 많은 한국국민들도 조지 W. 부시보다는 케리 후보를 선호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국민들이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는 말에 “그게 정말이냐”며 활짝 웃으며 반색하더군요.
그를 만난 곳은 맨해튼의 한 대형로펌 와일즈&와인버그로 유태계 인사들을 상대로 한 조찬 모임이었습니다. 그곳에 초대를 받아 짧지만 단독 인터뷰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의 영웅, 반전운동가, 정계거목이자 민주당의 대권주자였던 화려한 이력(履歷)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손하고 격의 없는 태도로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신장이 193cm로 역대 대권주자로는 가장 장신급인 그는 특유의 구부정한 자세로 “굿모닝, 써!(Goodmorning, Sir!)”하고 먼저 깍듯이 인사를 하더군요.
소탈함은 단지 인사말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시간 이상 계속된 조찬모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선 채로 연설을 하고 대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사실 말이 조찬모임이지 베이글과 크림치즈, 과일, 음료만 준비된 간단한 아침식사였고 자신의 위상에 걸맞는 거물들이 자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종 겸손한 자세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민주당의 대권주자 시절 유연한 대북정책을 보이기도 했던 그는 사안별 호불호가 분명한 정치인입니다. 2009년 4월 북한이 로켓 발사실험을 했을 때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통한 강력한 제재를 촉구(促求)하는 등 강경한 어조로 비난한 것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라크전쟁 초기부터 북한문제가 더 시급하다고 주장한 몇 안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유치한 수준이라고 폄하하고 북한과의 직접 대화 등 파격적인 의제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펼쳤습니다.
2004년 대선에서 그는 대선개표의 논란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혼란을 막기 위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러닝메이트인 존 에드워즈 부통령 후보가 오하이오의 미개표된 잠정투표와 부재자 투표를 들어 만류했음에도 자신이 출마를 선언했던 보스턴의 패뉴일 홀에 나와 “이제는 분열(分裂)을 치료할 때”라며 미국민의 단합을 외쳤습니다.
미국 최초의 유색인종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첫 대권 승리도 그 시발(始發)점(點)은 존 케리였습니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된 2008년 1월 8일 오바마 후보를 일찌감치 지지, 4년전 자신의 러닝 메이트였던 존 에드워즈는 물론, 가장 유력했던 힐러리 클린턴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했기때문입니다.
물론 오바마가 2004년 대선 당시 존 케리를 지지한 바 있으니 신세를 갚은 셈이지만 당시 정치신인이었던 오바마와 전 대권주자 케리의 무게감은 비교할 바가 못됩니다. 오바마로선 2008년 300만명 이상의 이메일 네트워크와 든든한 재원을 갖춘 케리 상원의원이야말로 천군만마(千軍萬馬)였습니다.
오바마 후보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케리 의원의 ‘오바마 대세론’이 결국 당선으로 이어지면서 두 사람은 남다른 인연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한 케리가 힐러리 클린턴에 이어 오바마 2기정부의 국무장관으로 바톤타치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바마는 대선후보이자 자신의 정치선배인 거물들을 연이어 세계 외교의 선봉장으로 휘하(麾下)에 두는 복많은 대통령입니다.

존 케리(John Forbes Kerry)는 1943년 12월 11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미들네임이 ‘포브스’라는 것이 이채롭습니다. 출판재벌 포브스가의 딸이 바로 케리의 어머니입니다. 아버지는 2차대전 참전용사이며 직업 외교관이었는데 아들 역시 참전용사 출신에 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영향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케리는 1966년 예일대를 졸업한 뒤 해군장교에 지원했는데, 베트남전에서 허벅지에 총상을 입는 등 각종 전투에 참가해 훈장을 여러 개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참상에 큰 회의를 갖고 전역 후 반전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반전(反戰) 베트남 참전용사회'의 대변인을 맡아 1971년 의회 청문회에서 베트남전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정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4선 상원의원인 케리는 95년 거대식품업체인 하인츠 가문의 상속인 테레사 하인츠와 재혼 가정을 꾸몄습니다. 첫 부인에게서 낳은 두 딸과 하인츠 여사의 소생 3명 등 5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아들인 존 하인츠 4세는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린 숭산대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불교에 심취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하인츠 4세는 숭산 큰스님의 제자인 김창식 씨가 전파한 불교무술 ‘심검도’를 연마하기도 했는데 2004년 숭산 큰스님이 입적했을 때 케리 상원의원이 애도하는 자필편지를 보내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당시 케리 의원은 “숭산 대선사는 젊은 시절부터 전 세계에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고, 켐브리지 선원과 각 나라에 100개가 넘는 선원을 건립해,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고요를 심어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가장 사랑하는 아들 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대선사의 가르침이 존의 삶에 큰 변화를 준 것에 대해 우리 가족들은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숭산 대선사와 함께 뜻을 같이 해온 모든 분들께 애도를 전한다”고 위로했습니다.

케리 차기국무장관이 곧 의회 인준청문회를 거치게 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의 새정부 지명자들과 달리 한때 대선후보였던 케리의 통과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케리 이전에 국무장관 후보자였던 수잔 라이스 UN 대사가 후보직을 사퇴한 것도 도덕적 흠결(欠缺)이 아니라 ‘설화(舌禍)’를 트집잡은 공화당의 정치 공세였던걸 생각하면 미국의 정치인들은 한국의 정치인들보다 확실히 몇 수 위인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도 젊고 낯선 동양의 기자에게 한없이 공손했던 케리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비단 케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접한 미국의 정치인들은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99% 좋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성이 잘나서가 아니라 정치 시스템이 그들로 하여금 ‘유권자 우선’을 몸에 배도록 했겠지요.
반면 한국정치에서는 인수위 일부 인사들로 시작된 자질논란이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이어 총리지명자로 번지며 시끌벅적합니다. 어쩌면 한결같이 그렇게 문제들이 많냐는 탄식(歎息)이 나옵니다.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이 먼지가 아니라 매연(煤煙)급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좀 능력이 떨어질지언정 덜 때묻은 인사들을 보고 싶다는게 너무 무리한 욕심일까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4-12-02 10:07:53 뉴스로.com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