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고래(古來)로 음력을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런데 궁금한게 있습니다. 대체 24절기는 왜 음력이 아니었을까 하는겁니다. 한달여전 지난 동지(冬至 12월22일)도 그렇고 곧 다가올 춘분(春分 3월21일)도 그렇고 하지(夏至 6월22일) 추분(秋分 9월23일)도 양력을 기준합니다.
우리가 음력을 쓴 것은 맞지만 24절기는 태양의 위치에 맞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길인 황도(黃道)를 따라 15°씩 돌 때마다 0°인 날을 춘분으로 하고 15° 이동하면 청명 등 15° 간격으로 24절기를 나눈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90°인 날이 하지가 되고, 180°인 날이 추분, 270°인 날이 동지입니다.
그리고 입춘(立春)에서 곡우(穀雨)까지 봄, 입하(立夏)에서 대서(大暑)를 여름, 입추(立秋)에서 상강(霜降)을 가을, 입동(立冬)에서 대한(大寒)을 겨울 등 4계절을 구분한거지요.
15일을 기준으로 보름달이 되는 달의 운동에 맞춘 음력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만 정확히 계절을 구분하기엔 어려움이 따릅니다. 아다시피 지구가 해를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입니다. 그러나 달이 지구를 1번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9.5일이고 12를 곱하면 354일이 됩니다. 11일의 오차가 나는것이죠.
이 때문에 음력은 2년 혹은 3년에 한번꼴로 윤달을 끼어넣어 1년을 13개월로 계산해 1년의 주기를 맞춥니다. 마치 양력이 4년에 한번 2월을 윤달로 해서 28일 아닌 29일이 되는 것처럼요.
지난해도 윤달이 있었는데 9월이었습니다. 첫 9월이 평달이었고 두 번째 9월이 윤달이 된 것이지요. 윤달은 여분의 남는 달이라 '썩은 달'이라고 해서 '하늘과 땅의 신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쉬는 달로서 이때에는 불경스러운 행동도 신의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윤달엔 조상의 묘를 이장을 하거나 결혼날을 택일한다든지, 집수리 및 이사를 하고, 집안 어르신의 수의(壽衣)를 준비하는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참고로 향후 윤달이 오는 해는 2017년(5월), 2020년(4월), 2023년(2월) 2025년(6월) 2028년(5월)...이 됩니다.
사실 24절기를 양력에 맞추긴 했지만 항상 날짜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양력도 100% 정확한 계산법은 아니기 때문에 하루 정도의 오차를 고려해야 하거든요.
봄: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여름: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가을: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겨울: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24절기중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 돌아왔습니다. 24절기 중 첫째 절기인 입춘은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으며 보통 양력 2월 4일경에 해당합니다. 입춘은 음력으로 주로 정월에 드는데, 어떤 해는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드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재봉춘(再逢春)’이라 한다는군요. 재봉틀이 아니라 재봉춘입니다. ^^
입춘하면 생각나는 사자성어들이 있지요?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수여산 부여해(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여라..는 뜻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입춘첩(立春牒)’이라 해서 입춘 당일에 집안에 붙이는 풍습이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한번 붙인 입춘첩은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이듬해 입춘이 되면 전에 붙인 입춘첩 위에 덧붙이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도 입춘행사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게 어디 있냐구요? 정말 있습니다. 바로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입니다. 우리네처럼 입춘첩을 붙이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모여 떠들썩한 행사를 치르니 과거 입춘을 맞아 마을에서 고사도 지내던 것과 비슷한 풍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photo by www.wikipedia.org>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마멋’이라고도 불리는 다람쥐과 동물(그라운드호그)을 이용해 봄이 언제 오는지를 가늠하는 날, 성촉절(聖燭節)입니다. 혹시 로맨스 코미디 영화 ‘사랑의 블랙홀(원제 Groundhog Day)’이라는 영화 기억하시나요?
1993년 영화인데요. 우리나라에선 흥행엔 실패했지만 무척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시니컬한 TV 기상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레이)는 매년 2월 2일에 개최되는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차 PD인 리타(앤디 맥도웰), 카메라맨 래리와 함께 펜실바니아의 작은 마을 팡서토니로 갑니다.
봄을 대표하는 2월 2일은 우드척(Woodchuck: Groundhog)이라는 다람쥐처럼 생긴 마못(Marmot)을 통해 봄이 올 것을 점치는 날입니다. 굴에서 나온 마못이 자기 그림자를 돌아보면 겨울은 6주이상 더 지속되지만 자기 그림자를 안보면 봄이 빨리 온다는 것이지요. 목적지에 도착할 필은 서둘러 취재를 끝내지만 폭설로 길이 막혀 팡서토니로 되돌아옵니다.
다음 날 아침, 낡은 호텔에서 눈을 뜬 필은 어제와 똑같은 라디오 멘트를 듣게 되고, 분명히 성촉절 취재를 마쳤는데 축제 준비로 부산한 마을의 모습을 보고 경악합니다. 자신에게만 시간이 반복되는 마법에 걸린 필은 당혹속에서도 특유의 악동 기질을 발휘해 여자를 유혹하거나, 돈가방을 훔치거나,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축제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 날마다 똑같은 하루가 계속되는 것에 절망한 필은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면 항상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잠이 깹니다. 그에겐 죽음이 아닌 성촉절만이 기다릴뿐입니다.
그러는사이 리타에게 사랑을 느낀 필은 악몽같은 상황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여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일기를 예보한 것처럼 이제는 하루를 예보합니다. 음식을 잘못 삼켜 질식하기 직전인 남자,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 타이어가 펑크나 쩔쩔매는 할머니들. 필은 매일 오차 없이 되풀이 되는 이 사건에 천사처럼 나타나 이들을 도와주면서 점점 선량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필은 이기심과 자만의 긴 겨울잠에서 인간애와 참사랑이 가득한 봄으로 새롭게 깨어난 것입니. 마침내 리타의 사랑을 얻던 다음날,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영화는 지금도 뇌리속에 선명하지만 미국에 올때까지 영화 제목이자 중요 소재였던 그라운드호그 데이가 대체 무엇을 하는건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겐 너무 생경한 풍습이었고 미국관객만을 염두에 둔 영화인만큼 친절한 소개는 없었으니까요. 기실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우리 제목이 무척 그럴싸했습니다. 같은 날이 계속되는 것을 블랙홀에 빠지는 것으로 비유한 셈이니까요. 미국에서 그라운드호그 데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도 알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듣보잡’ 아닌가요. ㅎㅎ
그라운드호그 데이는 1841년 독일계 미국이민자들이 펜실베니아에서 처음 행사를 시작하면서 시작된 풍습입니다. 그중 팡서토니마을이 유명한 곳이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라운드호그 데이를 연례행사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사진=뉴욕포스트 웹사이트>
뉴욕에서는 해마다 스태튼아일랜드 동물원에서 개최되는데 뉴욕시장이 나와 그라운드호그를 들고 봄이 언제 오는지를 판정합니다.
그라운드호그가 애완동물은 아니므로 사실 전문가 아닌 사람이 다루다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깝게는 지난 2009년 당시 마이클 블룸버그 시장이 그라운드 호그를 꺼내다가 그만 물리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가죽장갑을 끼었기 때문에 큰 불상사는 없었지만 그래도 날카로운 송곳니가 파고 들어 약간의 상처를 입고 말았지요.
뉴욕의 언론들은 그라운드호그가 블룸버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것 같다며 비꼬는 기사가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들어 뉴욕시장과 그라운드호그가 악연(惡緣)이 아닌가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블룸버그의 뒤를 이어 지난해 시장에 취임한 빌 드블라지오가 첫 성촉절 행사때 그라운드 호그를 집어들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드블라지오 시장은 블룸버그처럼 물리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주 두꺼운 장갑을 착용해 안전성을 높였지만 그때문에 손놀림이 둔감해 마멋을 놓치는 실수를 저질렀지요.
▲지난해 행사에서 드블라지오가 어설프게 안고 있던 그라운드호그를 놓치고 있다.<사진=CBS 화면캡처>
불운하게도 바닥에 떨어진 샬럿이라는 이름의 암컷 그라운드호그는 그만 심각한 내상(內傷)을 입었고 일주일간 시름시름 앓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한동안 비밀로 감춰졌다가 지난해 9월 뉴욕포스트의 보도로 세상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당장 말들이 나왔지요.
왜 그라운드호그가 죽은 것을 밝히지 않았냐는 비판에 동물원측은 “우리 동물원에 1500마리의 동물이 있는데 죽을 때마다 일일이 알려야 하느냐?”고 볼멘 소리를 했습니다.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특별한 동물이었으니까 하는 얘기지요. ^^
시장이 고의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문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그라운드호그를 어설프게 잡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미농무국은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아예 그라운드 호그를 굴밖에 끄집어내놓고 유리상자 안에 넣어둔 것입니다.
그전처럼 시장이 들어올리는 순서를 아예 배제해버린겁니다. 첫 행사에서 그라운드호그를 죽게한 전과(?)를 가진 시장은 자신때문에 그런 규정잉 생겼으니 좀 찝찝하지 않았을까요?
이때문에 언론은 모두 풍자성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뉴욕포스트는 행사 보도에서 “그라운드호그가 자기 그림자를 보는 것보다 시장을 더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이죽댔습니다. 뉴욕타임스도 “이번엔 시장이 그라운드 호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비꼬았구요.
어쨌든 이날 연단에 오른 드블라지오 시장은 유리상자안의 그라운드호그를 내려다보며 “(자기 그림자를 안봤으니) 곧 봄이 올 것입니다”고 말해 지켜보는 이들의 환호(歡呼)를 끌어냈습니다. 그런데 정작 2일 뉴욕 일원엔 폭설이 내렸고 추위도 당분간 계속될 전망입니다.
곧 봄이 올 것이라고 한 드블라지오 시장의 호언(豪言)과는 달리 그라운드호그 데이 원조인 펜실베니아 팡서토니에선 마멋이 자기 그림자를 봤다고 하네요. 올해 그라운드호그 데이 행사는 모두 33개 지역에서 했는데요. 공교롭게 봄이 일찍 올 것이라는 예측이 16곳, 겨울이 길 것이라는 예측이 16곳, 한곳(위스콘신 선프래리)은 ‘알수없음’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팽팽한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저는 겨울이 앞으로 6주 이상 계속될 것이라는데 한 표 걸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