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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중견기자의 편지. 1988년 Sports Seoul 공채1기로 언론입문,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2007-2010, 2012-2016), KRB 한국라디오방송 보도국장. 2006년 뉴아메리카미디어(NAM) 주최 ‘소수민족 퓰리처상’ 한국언론인 첫 수상, 2009년 US사법재단 선정 '올해의 기자상' CBS-TV 앵커 신디슈와 공동 수상. 현재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 편집인 겸 대표기자. 팟캐스트방송 ‘로창현의 뉴스로NY’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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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 배신감에 고통 심화” 르몽드 세월호 1주기 특집

글쓴이 : 노창현 날짜 : 2015-04-14 (화) 21:38:26

 

프랑스 최대 일간지 르몽드가 세월호 침몰 1주기를 맞아 지난 1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에 대해 대서특필(大書特筆) 했습니다. 이 기사는 도쿄 특파원인 필립 메스메르 기자가 서울을 방문 취재한 것입니다. 외신전문사이트 뉴스프로에 따르면 '사설과 분석' 섹션면 톱으로 올라 삽화와 함께 상당한 지면이 할애됐다고 합니다. 지난 12일 인터넷판에 실린데 이어 14일자 신문에 게재됐습니다.

 

"그 흰색 천막들은 여전히 광화문을 지키고 있었다. 거의 1년 전부터 한여름의 불볕 더위와 겨울의 매서운 추위,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을 견뎌내고 있다. 천막은 서울 심장부의 한 광장에, 불멸의 군인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동상이 표현하고 있는 굳은 시선 아래 위치하고 있다. 그는 일본을 상대로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낸 국민적 영웅이다.."

 

'세월호 침몰에서 잊혀진 사람들(Les oubliés du naufrage du Sewol)'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1년째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 천막을 지키고 있는 가족들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르몽드는 "천막 사이사이로 수많은 노란 리본들이 넘실거린다. 국민적 슬픔을 애도(哀悼)하기 위해 선택된 노란 리본은 한국 사회를 둘로 나누어 놓은, 깊이 새겨진 비극을 상징한다. 희생자 가족들을 괴롭히던 분노와 상심을 잠시 접어둔 채 묵념(黙念)의 순간을 맞이해야 할 참사의 1주기가 다가오지만 상처는 여전히 예리하게 남아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 사고로 아들을 잃고 대부분의 시간을 광화문에서 보내고 있는 조남송씨는 "너무 절망스러워 때때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집을 내팽겨쳐 두고 광화문에 진을 친 오영석씨도 "지금도 그날이 기억난다. 평소와 다르게 나는 내 아들과 아침 식사를 했고 여행 잘 다녀오라고 말해줬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번 참사가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일종의 '배신행위(une trahison)'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ᅟᅵᆸ니다. 오씨는 "참사 이후로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신문은 "실제로 침몰 당시의 상황은 여전히 모호하다.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선원들이 키를 잡은 배는 상당한 속도로 위험한 지역을 통과했고, 갑자기 방향을 선회했다. 뒤이은 조작이 배를 전복시켰다.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던 선원들은 안전 교육을 거의 한 번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전했습니다.

 

참사 이후 쏟아지는 정보들이 구조대의 태만(怠慢) 속에 동요(動搖)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딸 다윤이를 잃은 허흥환씨는 "언론에서는 사고지점으로 20대의 헬기가 보내졌다고 했는데 단 한대도 없었다"고 어이없던 당시를 돌이켰습니다.

 

르몽드는 "희생자 시신이 수습된 것은 민간 잠수사에 의해서였지 해경이나 해군의 의해서가 아니었다. 해군은 1590억 원(13500만 유로)을 들여 지난 2012년 건조한 한국 최초의 전문 구조함 통영함을 이용할 수 없었다. 통영함은 비리 스캔들의 한 가운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피해자 가족을 위한 연민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보이는 정부의 태도 때문에 가족이나 아이를 잃은 고통은 더욱 고조됐다. 사망 학생 한 명 당 42천만 원(357000 유로), 사망 교사 한 명 당 78천만 원(663000 유로)이라고 배상액을 발표한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부모 52명은 지난 42일 삭발을 감행했다고 정면으로 공박했습니다.

 

르몽드는 "부모들은 돈을 원한 게 아니었다. 사고의 진실 규명과 선박의 인양을 원하고 있지만 그 바람이 정부에 울림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난해 11월 채택된 '세월호 관련법'이 지난 327일 정부의 시행령 입법예고 이후 상당부분 수정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이런 정부의 태도들이 사고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참사를 잊게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비쳐집니다. 또한 극우단체들은 세월호 천막이 있는 광화문에서 주기적으로 시위를 한다. 피해자에 대한 배상 기준이 발표되자 이들은 가족들을 향해 '공금 도둑'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이기에 자식을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모진 말을 하는지요.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은 광화문과 안산 그리고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진도 팽목항에서 1주기 추모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르몽드는 "가족들은 어떤 방식으로 행사를 치러야 할지 망설이고 있다. 아이들을 희생시킨 이 비극에서까지 둘로 나뉘어 버린 사회의 이미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는 안타까운 현실을 전하며 기사를 갈무리했습니다.

 

다음은 르몽드의 원문기사와 뉴스프로의 번역본 전문입니다.

 

 

르몽드 세월호1주기 041415.jpg

 

Les oubliés du naufrage du « Sewol »

세월호 침몰에서 잊혀진 사람들

 

Par Philippe Mesmer (Séoul, envoyé spécial)필립 메스메르(서울, 특파원)

번역 및 감수 : Sang-Phil Jeong

 

Les tentes blanches se dressent toujours à Gwanghwamun. Depuis près d’un an, elles résistent à la chaleur de l’été, aux rigueurs de l’hiver et aux attaques des mouvements nationalistes. Elles s’accrochent aux pavés du cœur de Séoul, sous l’œil figé dans une éternité martiale de la statue de l’amiral Li Sun-sin (1545-1598). Lui est un héros national pour ses victoires navales contre les Japonais.

그 흰색 천막들은 여전히 광화문을 지키고 있었다. 거의 1년 전부터 한여름의 불볕 더위와 겨울의 매서운 추위,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을 견뎌내고 있다. 천막은 서울 심장부의 한 광장에, 불멸의 군인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동상이 표현하고 있는 굳은 시선 아래 위치하고 있다. 그는 일본을 상대로 해전의 승리를 이끌어낸 국민적 영웅이다.

 

Les tentes, elles, entretiennent le souvenir d’une tragédie maritime des temps modernes, celle du ferry Sewol, naufragé le 16 avril 2014 au large des côtes sud-ouest de la péninsule. Le drame a fait 295 morts et 9 disparus, principalement des élèves de première du lycée Danwon d’Ansan, ville modeste et industrielle à une heure de train de la capitale sud-coréenne.

천막은 2014416일 한반도 남서쪽 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의 슬픈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극은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낳았다. 피해자의 다수는 수도 서울에서 열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산업도시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Dans le camp flottent une multitude de rubans jaunes. D’une couleur choisie pour son évocation du deuil, ils symbolisent une tragédie qui a profondément marqué et continue de diviser la Corée du Sud. Les blessures restent vives à l’approche du premier anniversaire du drame, promesse d’un moment de recueillement comme d’une pause de la colère et des frustrations qui rongent les proches des victimes. « Je suis tellement désespéré, témoigne Cho Nam-song, qui a perdu son fils dans le drame et passe la plupart du temps à Gwanghwamun, que je n’ai parfois plus envie de vivre. »

천막 사이사이로 수많은 노란 리본들이 넘실거린다. 국민적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된 색은 노랑이었다. 노란 리본은 한국 사회를 둘로 나누어 놓은, 깊이 새겨진 비극을 상징한다. 희생자 가족들을 괴롭히던 분노와 상심을 잠시 접어둔 채 묵념의 순간을 맞이해야 할 참사의 1주기가 다가오지만 상처는 여전히 예리하게 남아있다. 이 사고로 아들을 잃고 대부분의 시간을 광화문에서 보내고 있는 조남송씨는 "너무 절망스러워 때때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Oh Young-suk, ouvrier du textile venu de la province de Jeolla du Sud, une région pauvre du sud-ouest du pays, pour trouver du travail à Ansan, a également déserté sa maison pour le camp de Séoul, où il se bat « pour que le public reste informé ». « Je me souviendrai toujours de cette journée, souffle-t-il. J’ai pris le petit déjeuner avec mon fils, ce que je ne faisais jamais. Je lui ai souhaité “bon voyage” avant d’aller travailler. » Ce voyage était important pour les lycéens d’une génération, celle de 1997, qui n’a pu faire ceux prévus en primaire et au collège. « En 2003, il y a eu l’épidémie de SRAS et en 2008, la crise, rappelle M. Oh. Ce voyage, c’était leur dernière occasion avant l’université. »

한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전라남도 출신으로 방직공장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안산에 정착한 오영석씨 역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집을 내팽겨쳐 두고 광화문에 진을 쳤다. 그는 "지금도 그날이 기억난다. 평소와 다르게 나는 내 아들과 아침 식사를 했고 여행 잘 다녀오라고 말해줬다"고 말했다. 특히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1997년생 고등학생들에게 이번 여행은 중요한 것이었다. 오씨는 "2003년에는 사스 파동이 있었고 2008년에는 글로벌 경제 위기가 있었다. 이번 여행은 대학 가기 전 마지막 기회였다"고 덧붙였다.

 

Le drame est d’autant plus douloureux qu’il est perçu comme une trahison. Dans un pays où l’éducation est essentielle mais extrêmement onéreuse, les parents sacrifient beaucoup pour que leurs enfants intègrent les meilleures universités. « Depuis le drame, j’ai arrêté de travailler, avoue M. Oh. A quoi sert de continuer ? On ne sait même pas pourquoi nos enfants sont morts. »

이번 참사가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일종의 배신 행위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교육이 전부이고 매우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하는 이 나라에서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최고의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많은 것을 희생한다. 오씨는 "참사 이후로 일을 그만두었다. 일은 계속해서 뭐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고 말했다.

 

De fait, les circonstances du naufrage restent floues. Parti du port d’Incheon, à l’ouest de Séoul, le navire voguait vers l’île de Jeju (sud-ouest). Piloté à vive allure par un équipage inexpérimenté dans une zone maritime dangereuse, il aurait brusquement viré de bord, une manœuvre qui l’a fait chavirer. Des travaux destinés à augmenter le nombre de cabines auraient déséquilibré sa structure. Les véhicules et la cargaison embarqués auraient été mal arrimés. Et leur brusque déplacement aurait favorisé le chavirage. Il est apparu que l’équipage, réunissant des personnes en contrat précaire, n’avait suivi quasiment aucun exercice de sécurité.

실제로 침몰 당시의 상황은 여전히 모호하다. 배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인천항을 출발해 제주도를 향해 항해했다.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선원들이 키를 잡은 배는 상당한 속도로 위험한 지역을 통과했고, 갑자기 방향을 선회했다. 뒤이은 조작이 배를 전복시켰다. 배가 갑작스럽게 출렁이자 대충 고정된 차량과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전복되도록 도왔을 것이다.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던 선원들은 안전 교육을 거의 한 번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Révélées après le drame, ces informations se sont ajoutées au désarroi des familles face à l’incurie des secours. Amenés par bus sur l’île de Jindo (sud-ouest), la plus proche du lieu du naufrage, les proches des victimes avaient été surpris par l’absence de moyens mis en œuvre. « Les médias parlaient de 20 hélicoptères envoyés sur les lieux, se souvient Heo Heung-hwan, qui a perdu sa fille Da-youn dans le naufrage. Il n’y en avait aucun. »

참사 이후 쏟아지는 정보들이 구조대의 태만 속에 동요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들은 버스로 사고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섬 진도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사고에서 딸 다윤이를 잃은 허흥환씨는 "언론에서는 사고지점으로 20대의 헬기가 보내졌다고 했는데 단 한대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Les premiers corps récupérés ne l’ont pas été par des gardes-côtes ou des marins, mais par des plongeurs volontaires. Le centre national de gestion des crises basé à Séoul a dû s’en remettre à la télévision pour suivre les progrès des secours. L’armée n’a pu utiliser le Tongyeong, premier navire sud-coréen de sauvetage en mer, terminé en 2012, ayant coûté 159 milliards de wons (135 millions d’euros), au cœur d’importants scandales de corruption.

희생자 시신이 수습된 것은 민간 잠수사에 의해서였지 해경이나 해군의 의해서가 아니었다. 서울에 위치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구조 상황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텔레비전을 참고했어야 했다. 해군은 1590억 원(13500만 유로)을 들여 지난 2012년 건조한 한국 최초의 전문 구조함 통영함을 이용할 수 없었다. 통영함은 비리 스캔들의 한 가운데 있다.

 

Rumeurs 소문

 

Les différents services impliqués n’ont jamais su se coordonner pour délivrer des informations fiables ou répondre efficacement aux urgences de la situation. La chaîne MBC ayant annoncé dans un premier temps que tous les enfants étaient sauvés, certains se sont rassurés. « Je me suis dit : “Ils seront tout mouillés” », se souvient M. Oh. Les rumeurs se sont multipliées. « On nous a dit que les enfants avaient été envoyés sur d’autres îles, se souvient Lee Min-woo, le père d’une des victimes. J’ai téléphoné aux hôpitaux et on m’a dit : “Personne n’est arrivé.” »

여러 관련 기관들은 신빙성 있는 정보를 주거나 비상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어떠한 조화도 이루지 못했다. MBC는 사고 초반 모든 학생들이 살아있다고 보도해 일부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오씨는 "'그럼 다 젖었겠네'라고 생각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소문은 확산됐다. 희생자 여학생의 아버지 이민우씨는 "누군가 우리에게 아이들이 다른 섬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나는 병원에 전화했는데 병원에서는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고 말했다.

 

La douleur de perdre un proche ou un enfant a été exacerbée par l’attitude du pouvoir, qui a multiplié les maladresses et semble incapable de témoigner d’une compassion réelle pour les familles. Le 2 avril, 52 parents se sont rasé la tête pour protester contre le projet gouvernemental de dédommagement annoncé dans l’urgence quelques jours plus tôt, 420 millions de wons (357 000 euros) pour la perte d’un enfant et 780 millions de wons (663 000 euros) pour chaque professeur décédé.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피해자 가족을 위한 연민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보이는 정부의 태도 때문에 가족이나 아이를 잃은 고통은 더욱 고조됐다. 사망 학생 한 명 당 42천만 원(357000 유로), 사망 교사 한 명 당 78천만 원(663000 유로)이라고 배상액을 발표한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부모 52명은 지난 42일 삭발을 감행했다.

 

Les parents ne veulent pas d’argent. Ils veulent une véritable enquête sur les causes du drame et le renflouement du navire. Un souhait que ne semble pas entendre le gouvernement, qui plaide depuis le 27 mars p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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