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5일 이란핵협상 관련 연설을 한 워싱턴DC의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펼쳐진 풍경이 개운찮은 뒷맛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은 '전쟁이냐, 외교냐?'라며 전례없이 강경한 수사(修辭)를 동원해 이란핵협상 합의안을 미의회가 승인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바마의 연설은 다분히 1963년 6월10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명연설을 의식한 것입니다.
당시 케네디는 극심한 동서냉전으로 핵전쟁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에서도 소련과의 대화를 반대하는 공화당과 행정부 내부를 겨냥, 이 대학 졸업연설에서 핵실험금지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청중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결과 두달후 미국과 소련, 영국이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에 서명했고, 미국 의회의 비준(批准)까지 받을 수 있었지요.
오바마는 이날 연설에서 "합의안을 거부하면 전쟁은 당장 내일, 혹은 3개월 후에 터지지는 않는다 해도 곧 닥칠 것"이라며 속된 말로 겁을 주었습니다. 그의 연설이 52년전 '케네디 후광'으로 약효를 발휘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시기와 장소의 상징성을 놓고 볼 때 적어도 한인사회는 마냥 편할 수는 없었습니다.
1893년 설립된 아메리칸대학교는 감리교 계열의 사립대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와 남다른 인연이 있습니다. 1943년 4월8일, 이승만 박사는 이 대학 교정에서 폴 더글라스 총장과 한인 학생 도리스 윤씨 등과 함께 제주 왕벚나무 식수 행사를 가졌기때문입니다.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미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전부터 도쿄시가 1912년 워싱턴DC에 기증한 3천그루의 벚나무 묘목 원산지가 제주 왕벚나무라며 이름을 '일본 벚나무(Japanese Cherry Trees)'에서 '한국 벚나무(Koeran Cherry Trees)'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식수 행사보다 1년 앞선 1942년 4월5일 뉴욕 타임스는 '워싱턴 벚나무, 한국 벚나무로 불러라(Calls Cherry Trees at Capital Korean)' 제하의 기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단체인 한미위원회(Korean American Council)가 수십년 전 워싱턴에 선물한 벚나무에 ‘일본산’이라고 붙은 것에 대한 항의를 제기했다"면서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한미위원회는 연방 정부에 전문을 보내 이 나무들은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훔쳐간 나무들이라고 강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어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弑害) 된 명성황후의 묘가 있는 양주골(경기도 남양주 홍릉)은 벚나무 자생지이기도 하다. 해마다 4월이면 수천 송이의 벚꽃들이 활짝 피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슬퍼하고 있다. 한미위원회는 워싱턴의 벚나무는 반드시 한국의 벚나무로 불러야 한다는 것을 선언한다"고 소개했습니다.
미 정부가 증거 부족을 들어 '동양 벚나무(Oriental Cherry)'라는 중립적인 이름을 제시하자 이승만 박사는 더글라스 총장 등과 협의해 미국의 심장부에 위치한 대학 교정에서 네 그루의 왕벚나무를 심고 이를 '한국 벚나무'로 공식 명명하는 행사를 가진 것입니다. 당시 J.E. 랜킨 하원의원은 '워싱턴에 심어진 벚나무들은 한국 울릉도가 원산지이며 상·하원은 이들 나무를 한국 벚나무임을 선포한다'는 결의안까지 발의(發議)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우리 정부는 지난 2011년 교정에 4400만달러의 예산을 들여 '한국정원(Korean Garden)'을 조성했습니다. 왕벚나무 20그루를 비롯, 무궁화와 소나무, 단풍나무, 제주참꽃나무 등 31종 200그루의 나무와 원추리와 털머위 등 제주 야생화 11종이 기증됐고 제주의 상징인 돌하르방 두 쌍과 동자석 한 쌍, 정낭 등이 세워졌습니다.
그런 아메리칸 대학이 지난 6월16일부터 8월15일까지 두달간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사진전'이 열리면서 지구상 유일한 피폭(被曝) 국가인 일본의 아픔을 세계에 내보이고 긴밀하고 돈독한 미국과 일본의 우호를 강조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오바마는 일본에서 히로시마 원폭투하 70주년 행사가 열리는 같은 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연설을 이곳에서 가진 것입니다. 원폭투하일에, 케네디의 52년전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한 연설을 행한 곳에서, 원폭피해 전시회가 열리는 아메리칸 대학교를 택한 것을 오바마는 '신의 한수'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히로시마 패널스..'라는 제목의 전시장 사진들은 가슴 아픈 원폭의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진마다 달린 설명을 보면서 끔찍한 핵무기의 결과에 전율(戰慄)하며 생명과 평화의 고귀함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폭으로 희생된 25만여의 무고한 민간인 가운데 한국인들이 최소 2만명 이상 있었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의해 고국을 등진 한국인들이 차별과 냉대속에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댓가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평생 고통속에 살아가면서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원폭피해국가로서 아픔을 호소하기 이전에 자신들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보듬고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는 모습이 선행되지 않는 일본입니다. 이 전시를 통하여 일방적인 피해를 입었음을 홍보할 뿐 반인륜적 식민통치와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는 찾을 수 없습니다.
왕벚나무가 우리의 것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아메리칸 대학에서 '피해자 일본'을 강조하는 원폭전시회와 이를 기화로 오바마의 연설이벤트가 펼쳐진 것은 그래서 씁쓸한 뒷맛을 남겨줍니다.
오바마가 연설하는 동안 코리아 가든은 경호상의 이유로 전면 통제됐습니다. 돌하르방은 마치 포박된 것처럼 긴 차단줄이 드리워져 오늘의 한미일 관계를 말해주듯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원폭 투하일에 관련 전시회가 열리는 아메리칸 대학교에서의 오바마 연설은 일본의 치밀한 외교전략의 승리는 아닐까요. 워싱턴의 사료연구가 문기성 씨는 "오바마의 연설과 원폭 사진전의 시너지 효과로 일본은 전범국가가 아니라 피해국가의 이미지로 교묘히 세탁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보다 몇 배는 더 뛰어야 할 우리 정부와 외교당국은 뭘 하고 있는걸까요. 문기성 씨의 말입니다.
"요즘 워싱턴 DC엔 집집마다 무궁화 꽃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대사관 정원엔 무궁화 꽃이 보이지 않습니다. 총영사관도, 문화원에서도 족보 없는 꽃들만 피어납니다. 반면 일본대사관 앞은 10여 그루 벚나무들이 봄이면 만개(滿開)해 사진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벚나무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우리 대사관 정원에선 나라꽃조차 찾을 수 없으니 한숨만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