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수도 뉴욕의 랜드마크는 뭘까요. 자유의 여신상?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록펠러센터?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맨해튼의 노란 택시, 옐로 캡(Yellow Cab)입니다. 이 옐로 캡에 드물지만 한국인 기사가 있습니다.
"사람 일은 모를 일이에요. 내가 미국에 살게 될 것도, 언론사 기자를 하게 될 것도, 택시 운전을 하게 될 것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황길재(미국명 필 황 45) 씨가 미국에 온 것은 2007년입니다. 한 벤처회사에서 음악관련 IT전문가로 일하다 2010년 뉴욕의 한인 라디오방송에 입사해 2년여간 기자로 뛰었습니다. 기자시절엔 마침 뉴욕 양키스에서 뛰고 있던 박찬호의 전담기자로 야구장에서 살다시피 했지요. 박찬호가 피츠버그로 팀을 옮긴 후에는 IT전문기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기자 일도 천직(天職)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경영여건이 어려워지면서 자의반 타의반 사직한 그에게 전혀 생각지 못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로 옐로캡 기사였습니다.
개척교회에서 만난 한인의 부탁으로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해주다 옐로캡 기사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옐로 캡의 오너였던 그는 마침 눈 수술로 일을 쉬고 있었고 한명의 기사가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보통의 택시기사보다는 월등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라이센스를 받고 마침내 옐로캡 기사가 될 수 있었지요.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물 흐르듯 살자'는게 인생철학이라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황길재씨의 삶은 특별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영화감독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습니다. 애오라지 영화만 파고들었습니다.
“서른 정도엔 칸 영화제 대상을 받을 수 있을줄 알았어요. 그러나 현실은 달랐지요. 무엇보다 저는 천재가 아니었거든요.”
운도 없었습니다. 졸업후 곽지균 감독 연출부에서도 일하는 등 충무로 진입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영화가 엎어졌습니다. 결국 영화판을 떠난 그는 산행으로 마음을 달랬지요. 그리고 중국 티벳, 네팔, 인도, 파키스탄의 고산지대로 순례여행(巡禮旅行)을 떠났습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은 1년여 계속됐습니다.
여행 후 정신세계원에 입사한 그는 동서고금의 정신세계 지식과 수련법을 익혔고 종국엔 뇌과학 강의까지 맡았습니다. 이곳에서의 인연으로 미국에서 다큐영화를 만들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건너간 미국에서 IT전문가와 방송기자를 거쳐 옐로캡의 세계까지 섭렵(涉獵)하게 된 것입니다.
옐로캡 기사는 5만여명이나 있지만 한국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 택시기사는 뉴욕시가 관장하는 옐로캡이 아니라 한인회사가 운영하는 유사택시를 몰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한국인 옐로캡 기사는 20-30명으로 추정됩니다. 덕분에 한국인 옐로캡 기사를 만나는 한국인 승객은 이산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하기도 합니다.
◆ 첫날부터 실수 사고 연발
황길재 씨는 2013년 7월17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헌절'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옐로 캡 영업을 시작한 날"이기때문입니다. 첫 손님은 JFK공항에서 아침 6시에 태운 60대 후반의 백인남성이었습니다.
맨해튼 미드타운에 가자는 손님을 태우고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했습니다. 맨해튼까지는 52달러 정액요금을 찍어야 하는데 그것을 잊고 미터기로 달린 것입니다. 자주 택시를 이용한 이 손님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닫고 "죄송하다. 미터요금이 얼마가 나오든 정액요금만 받겠다. 사실은 내가 오늘 처음 택시영업을 하고 당신이 내 인생의 첫 손님이다"라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 고객은 "그게 정말이냐?"고 놀라워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톨비까지 포함해 58달러가 요금이었지만 20달러가 넘는 팁까지 주었습니다. 첫 손님을 기억하기 위해 촬영을 요청하자 흔쾌히 응한 맘씨 좋은 신사였지요.
두 번째 손님도 실수 연발이었습니다. 맨해튼 남단에서 20대 초반의 중국계 여성이 탔는데 168가 소아병원이 목적지였습니다. GPS에 주소를 찍으려고 하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자.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는군요.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달리던 중 갑자기 오른쪽으로 가라고 해서 운전대를 꺾었다가 뒷 차와 부딪치고 만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했어요. 첫날 두 번째 운행에 사고를 내다니. 최악이었지요."
천만다행(千萬多幸)으로 다친 사람도 없었고 뒷차의 범퍼만 약간 손상된 정도였습니다. 경찰을 부르지 않고 면허증과 보험증을 교환하고 수습(收拾)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조금만 더 사고가 컸더라면 그날로 택시운전을 그만뒀을거에요. 첫날부터 제대로 액땜을 한 셈이죠."
뉴욕의 택시하면 옐로 캡을 떠올리지만 사실 택시의 종류는 아주 다양합니다. 커뮤니티 카로 불리는 리버리 택시가 약 2만5천대가 있습니다. 리버리가 옐로캡과 다른 것은 호객 행위를 못하고 콜택시 기능만 맡는다는 것이지요.
주로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블랙카 택시도 1만여대가 있고 초록색이어서 일명 '그린 캡'인 1만2천대의 보로택시도 2012년 도입됐습니다. 보로택시는 맨해튼을 제외한 4개 보로(퀸즈, 브롱스, 브루클린, 스태튼아일랜드)와 맨해튼 서쪽은 110가 이상, 동쪽은 96가 이상에서만 영업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 럭셔리 리무진이 약 7천여대, 장애인용 택시 패러트랜짓이 약 2천대, 커뮤터 밴 500여대도 넓은 의미의 택시들입니다.
최근엔 한국에서도 많은 논란을 빚은 우버 택시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게임의 법칙'이 바뀌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환경이 조성되면서 그간 옐로캡에 주어진 특혜(?)를 무시하고 자유롭게 영업하는 택시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옐로캡이 쇠락의 길을 걸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옐로캡은 단순히 택시가 아니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의 움직이는 랜드마크이기때문이지요.
2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는 어느새 베테랑 옐로캡 기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맨해튼 구석구석을 눈 감고도 갈 정도고 허둥대는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초보 시절엔 손님들로부터 최고의 운전이라는 칭찬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요즘은 그런 소리를 못 듣습니다. "어느새 타성에 젖은 옐로캡 기사가 돼 버린 것 같아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죠."
준수(俊秀)한 외모의 그는 미국에서 두차례 연극에 출연도 했습니다. 2008년엔 '이수일과 심순애'의 주인공을 맡았고 2012년엔 한인사회 최초의 창작뮤지컬로 화제를 모은 '자화상(극단 MAT)'에서 연기와 노래 실력도 뽐냈습니다.
옐로캡을 시작한 뒤로 이같은 '외도'를 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직업인으로서의 만족도는 높은 편입니다. 다른 기사 두명과 3교대로 일하는 그는 수요일과 금요일 쉴 수 있고 수입도 미국 와서 가진 직업 중 가장 많습니다. 하지만 50대가 되면 다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진짜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서지요. 미국에 온 뒤로 그는 언젠가는 바퀴가 18개 달린 초대형 트레일러를 타고 미 대륙을 누비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일주일 혹은 열흘간 쉬지 않고 대륙을 종횡으로 달리는 트레일러 기사들. 사막을 질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얼음길을 목숨을 걸고 넘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이 성인이 될 무렵, 거대한 화물 트럭을 몰고 북미 대륙을 누비는 트레일러 기사 필 황을 떠올려도 좋지 않을까요.
<下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