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남북공동성명 50주년의 소망
초등학생이던 1972년 9월 12일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퇴근하고 돌아와 웃으며 말씀하시더군요. “오늘은 전기불을 밤늦게까지 켜두라”구요.
이북에서 온 사람들때문이었습니다.
그해 7월 4일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습니다.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남과 북이 처음으로 만나 조국통일을 위한 대원칙에 합의한 날이지요.
그날 발표를 통해 사람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5일 평양에 밀사로 찾아가 김영주 중앙조직부장과 회담을 했고, 김일성 주석까지 만났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에서 답방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북의 박성철 부수상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려 32년이 지난후 2014년 통일부가 당시 청와대 사진을 공개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남북이 합의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읽어보셨나요.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비추어도 토씨 하나 고칠 필요가 없는 내용입니다.
첫째, (자주)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평화통일)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민족대단결)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이와 함께 남북 적십자회담 추진, 서울과 평양을 연결하는 상설 직통전화 배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에 합의하는 등 바야흐로 남과 북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드는 듯 했습니다.
그 시절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한뉴스는 “대화없는 분단대결의 시대에서 대화있는 분단대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의미를 두었습니다. 서로를 '괴뢰(傀儡) 집단'으로 여기며 오직 무력을 통해서만 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남과 북이 처음으로 대화를 통한 통일 원칙에 합의한 것이니까요. 7.4공동성명은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남북이 화해와 교류를 통해 통일의 길로 성큼 다가설 것으로 기대해 마지 않았습니다.
이어 남북은 남북적십자 1차 본회담을 8월 29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했고 2차 본회담을 9월 12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이북사람들 때문에 전기불을 켜두라”고 했다는 일화(逸話)는 북 대표단이 이날 판문점을 통해 들어와 숙소인 타워호텔(현 반얀트리호텔)에서 묵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호텔이 많지는 않았지만 타워호텔보다 나은 워커힐이나 조선호텔이 있었음에도 남산 중턱에 위치한 호텔을 북대표단 숙소로 한 것은 필경 서울의 야경(夜景)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공무원도 아닌 일반 회사에 재직중인 아버지가 그날 퇴근후 가족들에게 “전기불을 켜두라고 한다”고 하신걸 보면 이북사람들이 화려한(?) 야경을 보도록 하라는 정부의 독려(督勵)가 전방위적으로 이뤄졌음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70년대는 남북의 체제경쟁이 극심했던 시절입니다. 특히 반공(反共)을 국시(國是)로 한 박정희정권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월등 우세하다는 것을 홍보하고 싶었겠지요. 순한 양같은 국민들이야 며칠간 전기값이 더 나올지언정 “이북애들이 놀라도록 집집마다 전기불을 밝게 켜두자”고 했을테구요. 초등생이었던 저도 남쪽의 발전상에 이북사람들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뿌듯해 했던 것 같습니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남쪽의 경제력이 북쪽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지난뒤에야 알고나서 쓴웃음이 나오더군요.
박정희정권이 72년 7.4공동성명이라는 파격적인 합의를 한데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국제환경의 급격한 변화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냉전질서가 약화되면서 미국은 소련 중국과 화해를 추구했고 당시 닉슨 행정부는 ‘한반도 안정’을 위해 남북대화를 권고했지만 박정희정부는 달가워하지 않았지요. 이와 관련, 1970년 2월 미상원 외교위원회 한국문제 청문회에 나선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대사는 “남한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는군요.
결국 박정희정권은 1970년 전후로 3선개헌, 총선, 대선 등의 정치지형과 고도성장 계획 등 중대 국면에서 긴장조성이 유리할 게 없었기에 북과의 대화노선으로 선회(旋回)하게 됐습니다. 박통이 7.4공동성명을 하고 불과 3개월여 뒤에 ‘시월유신’ 선포로 사실상의 총통제를 구축한 명분 중 하나가 “남북대화를 추진하면서 국력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유신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 공동성명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소중합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어 2000년 6.15공동선언, 2007년 10.4선언, 2018년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남과 북의 정상들이 만나 합의한 모든 성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니까요.
남북대화의 물꼬는 1971년 박정희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며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회담은 72년 8월부터 73년 8월까지 평양과 서울을 7차례 오가며 진행되었지만 쌍방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결국 파국(破局)을 맞았습니다.
당시 남과 북의 정부가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고려했다면 조금씩 양보하여 합일점을 찾아 나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라도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고 정례화 되었다면 오늘날 대부분은 사랑하는 가족과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KTV 캡처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85년입니다. 2018년까지 총 21차례 대면상봉을 통해 20,761명이 만났고 7차례 화상 상봉을 통해 3,748명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두 번째 만남은 커녕, 소식도 알수 없이 기약없는 그리움에 눈물 흘려야 했습니다. 하물며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속절없는 세월에 몸부림친 수백만명의 한은 얼마이겠습니까.
2018년 11월 운좋게 방북취재를 하게 된 저는 북녘에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피와 살을 나누고 같은 언어를 쓰는 반쪽 겨레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만일 제가 이산가족의 하나였다면 그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겠지요. 2019년 10월까지 1년간 네차례 방북하면서 1분 1초라도 허투로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들의 심경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 대신 이산가족 누군가 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자리를 양보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전쟁의 포성(砲聲)이 멈춘지도 어언 70년입니다. 그동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남과 북을 오가더라도 오직 우리 민족만 서로 못보고 있습니다. 이제 생존 1세대 이산가족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은 2세대, 3세대, 방계 친척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가족(家族)은 한 지붕 아래 있어야 가족입니다. 이것은 인륜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부모가, 자식이, 형제자매가 수십년간 생사도 모른 채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가슴 저리고 애끓는 마음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국제환경이 엄혹하고 남북관계가 얼어붙더라도 이산가족만큼은 내왕을 하고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겨레의 화합와 통일을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부디 남북 양 정부는 오직 인본주의(人本主義) 정신으로 이산가족의 사무치는 한을 풀어 주십시오. 7.4남북공동성명 50주년을 맞은 오늘 간절한 저의 소망입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