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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독의 시인 레르몬토프

글쓴이 : 김원일 날짜 : 2012-01-10 (화) 14:09:21

나 홀로 길을 나선다.

안개속으로 자갈길이 빛나고 밤은 고요하다.

황야는 신에게 귀기울이고

별들은 별들과 속삭인다.

하늘은 장중하고 아름답구나.

대지는 푸른 빛속에 잠들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고

힘들게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기다리는 것일까?

무엇을 후회해야 하는 것인가?

이미 나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과거는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와 평온을 찾고 있다.

나는 모든 걸 잊고 잠들고 싶다.

하지만 무덤속의 잠이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잠들었으면...

생명의 힘이 가슴속에서

조근조근 잠들어

숨쉴 때마다 잠들어

가슴이 부풀어 오르게

밤새도록

하루종일 나의 귀를 잠들게해주며

달콤한 목소리가

나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내 위로는 영원히 푸르른

울창한 참나무가

몸을 숙여 수근거렸으면...

<‘나 홀로 길을 가네’ -레르몬토프->



“의혹의 날에도,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날에도 너만이 나의 안식처요, 의지였다. 강하고 참되며 자유로운 러시아어여! 네가 아니었다면 고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며 어떻게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누군들 그런 언어가 위대한 민족에 대한 선물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러시아 최고의 미문가(美文家) 이반 투르게네프는 만년에 ‘러시아어’란 제목의 산문시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그는 숨질 때까지도 곁에 있던 작가들에게 러시아어를 순수하게 잘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작가들의 이런 러시아어 사랑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일구어내는 밑바탕이 됐다. 이 시대를 풍미했던 러시아 작가는 푸슈킨을 비롯해 고골리, 레르몬토프, 곤차로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이 시대를 이끈 시인·작가들은 열거하기조차 힘들다.

 

이하 사진 www.ru.wikipedia.org 

러시아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에 대해 보통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인 뿌쉬킨의 뒤를 잇는 러시아 문호라고 일컫는다. 이는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뿌쉬킨이 서거한 이후 그의 명맥을 이은 문호라는 뜻이다.

그는 퇴역 후 왕성한 문학 활동과 더불어 문학을 통해 러시아의 역사적 삶을 기록한 인물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기존 작품 활동이 농익었을 즈음 그는 새로운 길에 도전한다. 고골의 말을 빌리자면 레르몬토프의 글속엔 러시아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듯한 매력이 펼쳐진다. 시인은 삶을 꿰뚫는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고골은 시인에게서 이 부분을 정확히 간파해냈다. 저속한 인간의 비열함이 그의 주요 테마였다.

“그는 해적선의 갑판에서 태어나 성장한 놈 같다. 그의 영혼은 폭풍우와의 싸움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해안에 내던져진 그를 그늘진 숲이 아무리 유혹해도, 평화스러운 태양이 아무리 비춰도, 그는 따분하고 괴롭다.”

몽롱하게 남은 어머니의 노랫소리

미하일 유리예비치 레르몬토프는 18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퇴역군인이었고 어머니는 부유한 명문귀족의 딸이었다. 어머니 쪽의 양친과 일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그러나 이내 두 사람 사이에는 알력(軋轢)과 불화(不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동안 어머니는 폐를 앓게 돼 1817년 레르몬토프가 불과 세 살 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레르몬토프의 머리 속에 어렴풋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요람(搖籃) 위에서 들은 어머니의 웅얼거리는 듯한 노래의 부드러운 가락, 그 멜로디는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며 매혹적 공상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그에게 몽롱한 기억으로 남은 멜로디는 평생 레르몬토프 귓가에 울렸고, 그는 늘 그 세계를 그리워했다. 어린 시절의 꿈같은 기억은 단순한 하나의 사실에서 환상적이고 이상야릇한 세계로 변했고, 이것은 시적 상징이 돼 레르몬토프 작품의 특징을 이뤘다.

어머니가 죽고 난 뒤 레르몬토프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개성이 강한 외할머니는 사랑하는 손자에게 양육비를 아끼지 않았다. 레르몬토프의 건강을 걱정해 세 번이나 카프카즈의 온천장으로 데려가기도 했는데, 그곳의 뛰어난 아름다움과 인상적인 산악부족들의 생활, 그리고 산악부족과 러시아 군인들 사이의 전투는 어린 소년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 푸쉬킨의 죽음을 계기로 귀족사회 격렬히 비판

1828년, 레르몬토프는 모스크바 대학의 귀족기숙학교에 입학해 자유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했다. 이 무렵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는데, 푸쉬킨의 시를 모방한 서사시 〈카프카즈의 포로〉와〈체르케스인〉을 썼다. 1830년 가을에 윤리 정치학부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면서 서정시〈천사〉,〈돛대〉등을 썼다.

  


1832년, 한 교수와의 의견 충돌과 부친의 죽음으로 인한 후유증(後遺症)으로 모스크바 대학을 중퇴하고, 주위의 심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병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때 그는 푸가초프의 반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 <바짐>과 서사시 〈악마〉의 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1834년 가을에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사르스크 연대의 기병소위로 임명됐다. 군에 근무하면서 그는 화려한 사교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러면서 글을 놓지 않고 틈틈이 희곡 <가면 무도회>, <귀족 오르샤> 등을 썼다. 1837년 1월, 푸쉬킨이 결투로 피살되자 그는 친구 라예프스키와 상의해 〈시인의 죽음〉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푸쉬킨을 죽음으로 이끈 당시의 상류 귀족사회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때까지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이 시 한편으로 그는 일약 유명해졌으나, 당국에 체포돼 카프카즈의 주둔부대로 추방당했다.

1838년 외할머니의 주선으로 1년여 만에 차르스코 셀로 근처의 소피야 부대로 돌아와 페테르부르그에서 생활한다. 사교계에서는 그를 궁정과 화해시키려 했지만 카프카즈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경험한 그는 도시생활이 권태로울 뿐이었다.

그즈음 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 만지기 시작한 서사시 〈악마〉의 최종판을 1839년에 끝냈고, 카프카즈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완성한 <우리 시대의 영웅>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레르몬토프에게 일생일대의 대작이자 유일하게 완성된 산문작품인데,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참된 의미의 소설문학으로 최초의 작품이었다. 그 가운데 한 편인 〈공작의 딸 메리〉는 그가 유배지인 카프카즈의 온천장 파치고르스크에서 병을 빙자해 요양하고 있을 때 만난 레브로바라는 처녀가 모델이 된 것이었다.

문제는 정치적인 반응이나 러시아식 사회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럽식 삶은 특히, 과거 찬란했던 프랑스 대왕정 시대에 현실화 되었던 자신의 영웅적인 시대를 거쳤으며, 현재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그 삶이 멈추었다.

 

그의 시를 보자.

오! 유럽의 찬란함이여/ 언젠가 불꽃처럼 꿈꾸던 우상이여/ 그많은 의심과 욕정 사이에 지쳐/ 믿음도, 희망도 잃은 채/ 기뻐 날뛰는 아이들의 노리개가 되어/ 이제는 무덤앞에서/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구나

레르몬토프는 M.A.로푸힌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탄했다. “안 그래도 너무 농염하지 않던 러시아는 점점 더 귀족주의 정신을 상실해가고 있다. 거기만큼 저질과 조롱이 넘쳐나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레르몬토프의 비판에는 당대의 귀족들의 삶이 보여주는 환락(歡樂)과 저질스러움에 따른 당혹감과 그로 인한 귀족 사회에 대한 거부감이 확연히 드러난다. 모든 문제는 <보통인> 이바로 시간의 무가치함, 정확히 말하면, 시간의 저속함을 실현시켰다는 것이다.

◇ 레르몬토프 죽음의 비밀

레브로바는 그의 비명횡사(非命橫死)의 한 원인으로도 전해진다. 주변사람들에게 독설에 가까운 익살을 퍼붓곤 해 미움을 샀던 그는 감출 수 없는 천재성과 명성으로 많은 젊은이들의 시기의 대상이기도 했다. 온천장에서 요양하고 있는 동안 페테르부르그에서 온 바르트이노프 소령과 만나게 됐는데, 레르몬토프는 이 소령에게도 날카로운 독설(毒舌)을 퍼부어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거기에 문제의 여인 레브로바에 대한 감정도 얽혀 있었던 것이다.

〈공작의 딸 메리〉가 발표됐을 즈음, 이 작품에서 천박한 군중의 대표자로 그려진 그루쉬니스키를 바르트이노프 소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해 두 사람 사이에는 충돌이 일어났고 마침내 결투에 이르게 됐다. 결투는 작품에 그려진 주인공 페초린과 그루쉬니스키의 결투와 똑같은 상황에서 이뤄졌다.

1841년 7월15일 두 라이벌은 근교 바위산의 벼랑 위에 마주보고 섰다. 레르몬토프는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총구를 위로 향해 공중에 대고 쏘았으나 바르트이노프 소령은 혼신의 증오를 담은 눈으로 레르몬토프의 심장을 정확히 겨눠 쐈다.

이리하여 러시아의 천재는 외국인도 아닌 러시아인 자신의 손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 지상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지상 이전의 세계에 대한 몽상에 잠겨 지상을 방황하던 영원한 고독의 시인,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반항하고 절망하며, 괴로워했던 넋은 마침내 영원한 밝은 그 고향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같은 레르몬토프의 삶과 문학은 고골리, 도스토예프스키 등과 같은 대천재에게로 이어져 러시아 문학의 강력한 흐름이 돼 도도히 러시아 문학 속을 지금도 흐르고 있다. 그는 1841년 7월 31일자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의미상으론 운명의 판결이 시안에서 러시아의 아들들 중 최고들에게 충격을 가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침략이...그리고 무엇으로 죄없는 희생자들을 구할 것인가...

그렇다, 레르몬토프의 죽음은 대체할 수 없는 상실로 한세대에 충격을 가해왔다. 이것은 개인의 일이아니라, 모두의 슬픔이며, 성경적 언어로 말하면 하늘이 보낸 처형이며 하나님의 분노이다, 백성은 자신에게 재를 뿌리고 교회에서 오래 기도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단순히 불쌍히 여기거나 울기보다 마음깊이 새기고, 철저히 자신에게 물어야한다.

우리의 시간이 이 사건의 모든 면을 명확히 해 줄 것이며, 다시 또 다시 철저히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지나간 시대가 어떤 것이 든 상관없다: 영웅적-무자비한, 비극적-용감한, 정열적-이중적, 이중적 시대는 자주 열정의 시대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이를 저속하다고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저질스러움은 어떤 경우라도 뒤뜰에 모여들었다. 다른 시인이 비록 다른 이유로 말하였다 할지라도 이렇게 말했다.

    

◇ 러시아 문학사에서의 위치

레르몬토프는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를 마감하는 문인이다. 그는 주코프스키, 푸쉬킨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시의 율격(律格)을 분위기에 따라 자유자재로 조정하고 서정적 서사시에 산문을 접목시키고자 노력하는 등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특히 그가 산문에서 보여준 심리 묘사는 이후 리얼리즘의 중심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에 의해 발전되는 등 후대 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레르몬토프의 공로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1820년대까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산문을 단숨에 주목받는 장르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푸쉬킨과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산문의 아버지로 불려 마땅하다. 비록 완성작은 한 편에 그쳤지만 《우리 시대의 영웅》 이후 산문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 공의 지대함을 알 수 있다. 한편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는 '자연파'의 태동에도 일조했다.

비록 뜻하지 않은 이른 죽음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들은 그의 노력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그는 분명 러시아 낭만주의가 남긴 마지막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다. 물론 레르몬토프는 어떤 결투도 원하지 않았고, 피흘림은 더더구나 원치 않았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이 총을 쏘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도 향한 그리고 자신의 적대자들을 부르는 구두적 조롱의 불길을 원했던 것 뿐이었다. 그는 단순히 저질스러움에 대해 빈정대는 방법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용서도 없었다.

babo.ivan@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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