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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2006년 한국 인사로는 처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상원의원 시절 단독 인터뷰했고 미 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인유권자센터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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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되는 ‘웬디 셔먼’의 상원 인사청문회

글쓴이 : 김동석 날짜 : 2011-09-17 (토) 05:58:54


1994년 6월 어느 날, 클린턴 대통령은 재래식 전쟁의 위험을 감수(甘受)하고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沮止)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펜타곤은 대통령에게 세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고 클린턴 대통령이 마지막 결정(북한과의 전쟁)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시간 전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이 영변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를 중단하고 미국과 협상하겠다는 것이었다. 1시간 차이로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한국전 이후, 미․북간의 가장 아슬아슬한 전쟁위기를 넘겼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평양방문의 결단과 노력덕분이었다.>


94년 봄, 이른바 ‘한반도 위기설’을 직접 체험한 펜타곤의 수장인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후일 <두 개의 한국>의 저자 ‘존 오버도퍼’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공군이 마련해 온 대북 공격 가상 시나리오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www.en.wikipedia.org

당시 시나리오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터지면 90일 안에 미군 5만2천명과 한국군 49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이 기간에 치러야 할 전쟁 비용은 61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것이다. 특히 휴전선 근방에 화력을 집중 배치한 북한은 전쟁개시 10시간 안에 박격포 5000발을 발사해서 서울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전쟁 시나리오를 접한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이 같은 시나리오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윌리엄 페리는 결정권을 가진 직책에 있으면서 자신이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필자는 2006년 뉴욕의 외교협의회의 모임에 참가한 페리 장관을 한 테이블에서 만날 수 있었다.>

윌리엄 페리는 클린턴 행정부 초기에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는 스탠퍼드와 유 펜에서 수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방관련 기술업체를 설립하여 첨단 감시 장치(레이더)를 개발해서 국방부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어서 군수산업계에 알려졌다. 그런 유명세에 힘입어서 지미 카터 행정부로부터 국방차관에 스카웃 되었다. 그 후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과 장관을 지냈다.

1998년 8월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건설 의혹보도와 인공위성 발사실험으로 인해 미국의회에서 대북 강경기류가 형성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다. 미국 행정부의 북한정책을 전면 재검토 할 것을 지시했고 한국. 미국. 일본 등 관련국들의 북한정책을 미국의 입장에서 총 검토한 후 보고서를 내도록 지시했다. 한반도전문가들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북 정책안으로 여기는 소위 ‘윌리엄 페리 보고서’다.

윌리엄 페리 보고서는 빌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을 전쟁에서 협상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매들린 울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과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으로 이어졌고 북미 미사일 협상이라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 밑에서 ’페리보고서‘를 입안하여 완성한 사람이 바로 ’웬디 셔먼‘이다.

 

웬디 셔먼은 윌리엄 페리 장관의 대북정책조정관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녀는 내친김에 ‘매들린 울부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인도 했고 그리고 북한군부의 총수인 차명록 차수를 워싱턴 DC로 초청했다. ’웬디 셔먼‘은 이어서 곧바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발표했다.

지금도 한반도 전문가들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훼방만 아니었다면 빌 클린턴과 김정일간의 정상회담과 북미수교도 가능했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지난 6월말, 오바마 대통령은 바로 이 웬디 셔먼을 국무부의 제2인자 자리에 임명했다. 그녀의 방식이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라고 예상하는 일이 무리가 아니다.


웬디 셔먼은 주고받기식의 협상전문가다. 그녀는 전쟁을 막는 일이라면 그것 이상의 외교적 승리는 없다고 믿는 ‘평화’의 소신파다. 소련이 해체(解體)된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목표는 ‘북한’임을 일찌감치 간파(看破)하고 아시아쪽에 뛰어 들었다. 북한을 ‘발톱의 가시’라고 표현하면서 그 가시를 뽑아내려면 잠깐은 아픔이 있다고 설명한다.

1999년 ‘페리 보고서’를 낸 후 그녀는 울부라이트 국무장관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과 종지부(미북간 외교정상화)를 찍어야 한다고 졸랐다. 그녀의 집요한 설득으로 김정일은 미국의 국무장관을 평양의 그의 안방에서 만났고 인민무력부의 총수인 조명록 차수는 백악관을 구경하는 호강을 누렸다.

웬디 셔먼이 오바마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서 북한의 행보가 발 빠르게 변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의 대북한 입장에 유연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냉정한 시각으론 ‘미묘한 흐름’이란 평가가 맞지만 여하튼 얼어붙은 남북관계엔 ‘해빙(解氷)’의 기미다. 지난 7월, 김정일 위원장은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대량살상무기(WMD) 실험의 잠정중단(모라토리엄)’이라는 발언을 했다.

곧이어 한국정부는 통일부장관을 온건한 협상파로 교체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한 정책이 가시화 되면서 한반도 길목의 신호등 불빛에 초록색이 들어왔다. 워싱턴 상원의 공화당 인사들이 ‘웬디 셔먼’의 국무부 입성을 지연(상원인사청문회)시키고 있지만 여하튼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한 드라이브에 시동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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