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 번째 월요일은 이름하여 노동절 ‘Labor Day’ 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알고 있었던 노동절과 사뭇 차이가 있는 미국 노동절은 휴가를 연상시키는 연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듯 보인다.
여름이 끝나는 날 정도로 알거나 캠핑이나 여행을 가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쏟아지는 파격적인 세일상품을 찾아 작정하고 쇼핑하는 날로 받아들이기때문이다. 방학중인 자녀들이 있는 집에서는 개학준비물을 챙기기도 하고 가족들이 한데 모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여름을 아쉬워하며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게 대부분의 풍경이다.
올 해 미국인들이 맞은 노동절은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깊어가는 미국의 불황과 장기적인 실업사태로 해서 노동절 연휴가 결코 가볍지 많은 않았으리라!
이맘때 즈음해서 매해 남편과 함께 시댁을 방문한다. 지난해 마저 끝내지 못하고 온 일들 마무리를 위해서, 망가진 곳을 찾아 손을 보기 위해서, 고령의 시부모님 동선을 따라 가든을 정리하기 위해서, 옥상에 일년간 쌓인 부엽토들을 치우기 위해서 그리고 창고 내지는 짐 정리를 하기 위해서이다.
▲ 지붕에 올라가 켜켜이 쌓인 부엽토를 치워야만 배수구가 막히지 않아서 최소한 일년에 한번은 해야하는 연례행사이다.
말이 국내지 비행거리로 뉴욕에서 6시간에 차로 2시간 여 걸리는 시댁에 도착해서도 쉴 겨를이 없다.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보니 개인 시간도 없고 재미도 없다. 해 떠서 해 질 때 까지 움직이다 보면 하루 해가 금방 가고 시댁을 나올 때 즈음엔 몸살에 파김치가 되어 버리곤 한다. 그야말로 노동에 충실한 노동절이다.
그게 늘 미안했던지 이번에는 일을 좀 더 일찍 끝내고 며칠 말미를 잡아 가고 싶은곳이 있으면 가자고 했다. 이때다 싶어 지도를 폈다. 아들과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는것도 좋지만 명색이 휴가인데 조금은 쉬어도 줘야지 싶어서 아직 한번도 닿지 않은 곳엘 가리라하고 검지 손가락으로 지도 한켠을 가리켰다.
거리상으로는 약 500 마일, 차로 쉬지 않고 달리면 얼추 9시간 소요되는 그곳은 ‘Death Valley(죽음의 계곡)’ 이라 부르는 국립공원이었다. 마침 국립공원 일년 정기주차 패스도 있겠다 싶어 우리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시댁을 나섰다.
힘든 노동을 끝내고 달려가기엔 너무 멀고 힘든 목적지였지만 ‘죽음의 계곡’이라는 지명에서 묘한 모험을 자극하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마치 ‘이열치열(以熱治熱)’ 식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 우리로 하여금 미지의 땅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을 갖게 했다.
떠나는 날 아침 남편의 친구 집을 찾았다. 시인이자 나무작업을 하는 리온(Leon)과 사진작가이면서 공예가인 유지니아(Eugenia) 부부는 태어난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는 그 동네의 전설이다.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시댁 흉도 보고, 작업장도 둘러보고 그들 부부가 최고로 자랑하는 바다가 한눈에 쫘악 펼쳐진 전망좋은 테라스에서 차도 마셨다.
▲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오는 친구의 집에서 나누는 밀린 이야기가 끝이 없다.
태평양을 보면서 심호흡을 하고 나니 비로소 서부에 와 있음이 실감되었다. ‘털복숭이’, ‘게으름뱅이’, ‘철학자’ 라는 재미난 이름의 고양이 세 마리가 번갈아 펼치는 재롱과 쇼를 보면서 그간 시댁에서의 긴장과 피로감을 조금씩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 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털복숭이, 게으름뱅이, 생각 많은 시선으로 한곳을 응시하길 잘하는 5살박이 '철학자'
데쓰밸리 쪽으로 가면서 남미 노동자들이 많은 동네의 유명한 멕시칸 타코(Taco) 식당도 찾아 입이 미어지도록 맛난 음식들을 먹어주고 나니 그제서야 해방감과 즐거움이 만끽되었다.
시댁에서의 일은 고단했지만 한편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어른이 손수 준비하는 식사의 양은 당신들에게 맞춰져 있어서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난 우리에겐 '새의 모이' 만큼이나 느껴지는 양이어서 은근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다.
▲ 만약, 남미에서 온 노동자들의 일손이 없다면 우리 밥상에 야채와 푸성귀들을 올릴 수 있을까?
죽음의 계곡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결국 자정께 라스베가스에 닿았다.
도박의 도시답게 변함없이 화려하다 못해 현란한 네온이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시댁을 나설 때는 도착하면 피로감이 엄습해서 도착지 어디서든 내리 12시간 정도 실컷 잤으면 했는데 막상 번쩍거리는 네온의 도시 아래 서니 여행에 대한 흥분과 재미로 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누비고 다녔다. 어디서 잘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역사가 느껴지면서 화려한 수영장이 있는 카지노 호텔 한곳을 정하고 들어갔다.
▲ 플라멩고라 불리는 아프리카산 홍학들이 한가롭게 카지노 호텔 정원을 노닐고 있다.
부담되지 않는 저렴한 숙박요금도 좋았고 체크인도 순조로웠으며 야경(夜景)이 좋은 방에 들어갈 때 까지도 좋았다. 그러나 물이 나오질 않았다. 그날따라 파이프에 문제가 생겨 점검중이라 아침이 되어서나 물이 나온다고 했다. 대신, 마실 물은 충분히 있으니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아무리 샤워는 못하더라도 화장실은 가야하고 적어도 이는 닦고 자야 해서 카지노로 나갔다. 라스베가스 카지노처럼 지루하지 않게 밤 새우기 좋은 천국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우리는 꼬박 밤을 샜다. 물론, 저렴한 가격의 숙박요금 대신 재미를 저당 잡힌 채 주머니도 털렸다.
아침이 되어서야 샤워를 하고 죽음처럼 깊은 잠을 서너 시간 자고 나서 허겁지겁 야외 수영장엘 갔다. 그릴에서 고기 굽는 바비큐 냄새가 진동하고 지중해 빛의 화려한 음료수들을 마시면서 적당히 노출된 수영복 차림의 선남선녀들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함께 쏟아지는 물 폭포를 맞으며 잡념도 잊을 수 있었다.
그래 이런 것들이 노동절 연휴 때 사람들이 즐기는 휴가의 진미(眞味)로구나 생각하면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니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왠지 점심은 정말 그럴싸한 곳에 가서 포만감 있게 먹고 싶었다. 한동안 밥을 한번도 먹지 못한 뱃속에서 ‘고향음식’을 자꾸 불러댔다.
그래 이런 관광지엔 한국식당도 많이 있겠다 싶어 발품을 팔아 어렵사리 식당 한곳을 물어찾아 갔다. 분식점을 연상시키는 작은 실내도 그랬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은 ‘스팸 부침과 계란 후라이’ 를 가장 선호한다며 차림표를 내미는 하와이 사람 주인장을 보려니 기가 막혔다. 남편은 ‘한국식당에 와서 스팸을 먹느니 차라리 햄버거를 먹겠다’ 고 했다. 어렵사리 찾아온 시간을 생각하자니 아깝기도 하여 내가 고집을 부려서 먹자고 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찐 만두를 시키고 난 그만 속이 답답했던 차여서 그랬는지 냉면이 한 눈에 떡 들어왔다.
솔직히, 그날 먹은 ‘한국 음식’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여행에 대한 흥분과 기대감 위로 찬물 바가지를 끼얹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냉면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음식이란 사실도 처음 알았고 그렇게나 맛이 없을 수 있음도 그때서야 알았으며 차갑지 않게 나올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맛도 형편없는 냉면이 양은 왜 그리 또 많던지......
▲ 보기엔 그럴듯해도 세상에 이토록 맛이 없고 엉터리인 냉면이 또 있을까?
길 찾느라 허비한 1시간, 식당에서 기다리느라 1시간을 버리고 얻은 대가치곤 너무 짜증났다. 이제껏 그토록 한국식당 가자고 고집을 피워 본 적이 없는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며 한 두어개 먹고 만 남편의 속은 텅텅 비었고 한국음식에 대한 실망감과 한국음식점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고집 부린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고갤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 데쓰 밸리로 향하는 길 이정표
‘죽음의 계곡’ 을 향하는 길. 갈 길이 멀었는데 내 입지는 죽음의 계곡 그 언저리에 가있는 느낌이었으며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져만 가고 있었다.
▲ 제목 : Multi Figures. Labor Day 에 되새겨보는 문구 ‘이마에는 예절이, 가슴에는 사랑이, 손에는 노동이 있으라’ 종이에 잉크 2011
<中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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