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서 밤에 공원에 나와 앉는 횟수가 늘었다. 공원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멋쩍은 형편없이 부족한 곳이지만 찻길을 막고 의자들을 갔다놓은 것만으로도 도심 한 가운데 쉬었다 갈 수 있는 공원 노릇은 톡톡히 하고 있는 편이다.
도심의 한 복판 공원에서 할 수 있는 일로는 사람들 구경이 제일인데 30여분 앉아 있으면서 세 쌍의 커플을 보게 되었다. 요즘처럼 날씨가 더운 그야말로 핏자 화덕마냥 뜨겁고 끈끈한 삼복 더위 속임에도 애정표현을 숨기지 않아서 그런지 아님, 그들이 모두 동성 연인(同性戀人)들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6월 26일 일요일 아침 7시반 경. ‘달고나’ 같은 단잠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있는데 도로를 휘저으며 질주하는 모터사이클 부대의 경적(警笛)소리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한국식 배달 폭주족’들도 정녕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잠을 훼방하지 않거늘 누가 감히 저러나 싶어 옥상으로 올라가서 아래를 굽어다 보았다.
퍼레이드 준비로 집 옆의 블록이 분주해 보였다. 맨해튼에서 퍼레이드가 있기라도 하면 멀리 나가는 수고 없이 바로 구경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거들지만 정작 사는 입장이 되어보면 하루 종일 나는 소음(騷音)에, 도로가 막히고, 경찰들이 쫙 깔리고, 도로변에 넘쳐나는 쓰레기들로 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을 모르고들 하는 말씀이다.
여하튼, 잠은 깼고 해서 브런치나 먹자며 집을 나섰다. 어떤 애들이 그토록 요란스럽게 난리법석을 떨어가면서 아침잠의 평화를 깨가면서 도심을 휘젓고 다니는지 찾아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지갑과 함께 똑딱이 손 카메라 하나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밥 먹으러 가는데 그건 왜 가져가?” 영문 모르는 옆지기는 카메라를 챙기는 나를 두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도 모르게 나온 대답은 이랬다. “누가 아침부터 떠들고 다니는지 찍어 두었다가 혼내 줄려고” 마치 초등학교 자습시간에 떠드는 아이들 이름들을 칠판에 적곤 하던 때의 주번이나 줄반장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도로는 벌써부터 경찰들에 의해 차단되면서 한쪽에선 차들이 견인(牽引)되고 있었다. ‘일요일 주차 불가’ 라는 표시가 여기저기 삐라처럼 나붙어 있음에도 차량 주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일요일 인데 어떠랴 싶어서 주차해놓고 아침잠을 즐기고 있을게 분명하였다. 주차된 차량 모두에 명예 훈장이라도 추서하듯 경찰 또한, 벌금 딱지들을 일일이 붙이고 다니느라 분주했다.
견인 후의 빈자리에는 행진 용 오픈 카 들이 속속 들어와 자리를 메우고 동작 빠른 곳에서는 벌써 음악을 틀어대고 요란한 치장(治粧)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풍선을 부는가 하면 방송장비를 챙겨보는 기자와 아나운서도 보이고 물 만난 고기처럼 셔터를 미친듯이 눌러대는 사진작가들과 달러 사인이 눈에 보이는 상인들로 해서 복잡해지고 번잡해졌다.
행진은 12시에 시작이라 3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집 주변은 온통 갖가지 형태의 무지개( Rainbow) 색깔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깃발은 기본이고 옷, 가방, 머리띠, 신발, 배낭, 양말, 목걸이며 팔찌, 문신에 심지어는 동반한 강아지 털조차도 무지개 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무지개 상징을 다양하게 표출함으로써 그들만의 소리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리라.
맨해튼의 행사 중에서 이렇게 요란하고도 현란한 행진이 또 있을까? 눈을 휘둥그러지게 만드는 참가자들을 뭉뚱그려 설명하고 일일이 열거(列擧)하기는 어렵다. 재밌지만 쳐다보기 민망하고, 감탄을 자아내면서도 한편으론 지나친 노출과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도 만드는 것도 이 게이 퍼레이드(Gay Parade)의 특색이다.
올해는 늘 쓰던 게이(Gay)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 ‘자긍심 행진’ 이라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게이들과 화려하게 여성 분장과 복장을 한 드래그 퀸(Drag Queen)들과 반라(半裸)의 게이들이 차량의 확성기에서 음악이 나오자 신나게 춤을 추고 들이대는 카메라에 포즈를 취해주는 광경에 눈을 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아침밥은 잊어 버린지 오래였다.
▲ 드래그 퀸 복장의 참가자들
그들의 들뜬 표정들을 보면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니 커밍아웃한 동성 커플들이 꽤 많다는 것. 사회적인 편견(偏見)과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아직도 감추고 그늘진 곳에서 성 정체성의 혼돈과 방황을 하는 이들까지 합치면 정말 많은 동성애 커플들이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뉴욕 주는 지난 달 동성애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다. 코네티컷(Connecticut), 아이오와(Iowa),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뉴햄프셔(New Hampshire), 버몬트(Vermont), 워싱턴 디시(Washington, D.C) 에 이어 뉴욕이 그 대열에 들어섰으며 효력은 2011년 7월 24일 일요일부터 갖게 된다.
그래서 그랬을까? 올 행진엔 연인임을 드러내는 공식커플들이 어느해보다도 많아 보였고 달라진 기운을 받았다. 마치 바깥 세상에 기지개를 켜고 나온 것처럼 축제 분위기가 한껏 돋았다.
친구 중에 화가인 마누엘은 고미술 복원 작업을 하는 그의 연인과 25년째 일편단심 살아오고 있다. 언젠가 뉴욕 주에서도 법이 통과되면 결혼식을 할거라며 증인이 되어달라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결혼을 하면 입양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 대목에서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될 수 도 있다) 동성커플에게 입양된 아이는 양 부모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두 아빠로 아님 두 엄마로? 역할로 나눠서 불러야 맞을까? 체격으로 구별해서 덩치 큰 아빠나 작은 아빠로? 날씬한 엄마와 뚱뚱한 엄마로? 아님, 어른들을 이름으로 호칭하는게 맞을까?
동성 결혼이 늘어남과 동시에 아이를 입양하는 빈도수도 비례해서 늘어나게 될 터인데 이제는 남편과 아내를 뜻하는 부부(夫婦), 부모(父母) 라는 단어가 아닌 다른 적절한 호칭의 신조어가 만들어질 때도 되었다는 어떤 이의 말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주지사와 뉴욕 시장이 행진을 선도하는 가운데 여러 목소리가 적힌 팻말들이 하늘을 찌르고 깃발들이 나부끼고 환호성을 지른다. 연도의 시민들 속에서 박수가 터지고 함성이 일고 호루라기 소리도 들린다. 감격에 겨워 눈물짓는 커플도 있고, 연인을 꼭 부둥켜 안고서 망부석(望夫石)처럼 굳어버린 이들도 보였다.
곧이어 나타난 요란한 소리 부대. 여성 레즈비언(Lesbian) 그룹과 남성 게이(Gay) 그룹들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행진을 시작한다.
앞사람의 허리를 꽉 껴안고 달리는 모습은 어느 연인이나 마찬가지로 보기 좋은 그림이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탄 그림이 왜 내 눈에는 아직도 서먹한지….
포효(咆哮)하듯 끝도 없이 울려대는 클랙슨 경적음과 손에 쥐가 나도록 흔들어 대는 무지개 깃발들을 보면서 문득 코 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 행진을 하는 오늘만큼은, 그리고 법이 발효되는 24일은 온통 그들만의 세상이리라~ 마음껏 눌러대고 싶은만큼 눌러라. 아침잠을 설치게 한게 얄미워서 눈이라도 잔뜩 흘길 기세로 나왔는데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들을 향해 나지막하지만 힘주어 전하는 인사 한마디.
축하합니다. Congratulations!
▲ 제목/ Model 'Chuck'/ 종이에 물감/ 2008/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이 들어있는 얼굴 크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