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운무가 드리워진 이른 새벽 지인을 따라 길을 나섰다. 북악산 자락을 헤집으며 열심히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작은 산사. 빗방울이 듣는듯 싶더니만 이내 거세지면서 초록의 싱그러움이 한껏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분명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절에서 만나는 대 숲과 장독대, 석탑, 이름없는 작은 꽃들 위로 비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흔들리는 오색연등 빛깔이 더욱 곱고 선명하다.
연등 아래엔 이름들이 가득 써 있고 그 옆에는 다른 여느 절에서 보지 못한 독특한 발원문이 써있었다. 분명 글씨일진대 바람에 흔들리자 그 문구들이 후두두둑~내 마음자리로 떨어지는듯 싶다.
‘거짓말 하지 않기를 발원하며’ ‘가장 큰 재앙이 원망과 미움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그 감사함으로’ ‘내 귀로 들은것만 옳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바람소리의 평온함을 알게된 감사함으로’ 등등 결코 추상적이지 않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문구들이었다.
▲ 제목 Figure. 2007/ 종이에 싸인펜. 모델의 포즈를 통해서 오체투지로 절을 올리는 모습이 연상되는것 같다.
불자는 아니지만 부처님 오신날에 인연이 닿아 절까지 왔으니 법당에 들어가 예를 올리고 나왔다. 막 나서려는데 공양간에서 아침을 못하고 왔을거라며 아침상을 내주셨다. 찬이래야 김치 하나에 조촐한 나물 두엇 그리고 된장국 한그릇이 전부였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밥상이었다. 절간에서 먹는 밥은 건강함 이상의 그 뭐랄까? 향기가 느껴지는것 같다.
▲ 절 마당의 하얀 고무신에 빗물이 담겨있는 모습이 정겹다.
'공양(供養)' 이란 단어는 불교 용어로 '밥먹는 것'을 말한다. 즉, 음식물이나 의복 등을 불, 법, 승의 삼보나 부모, 스승, 죽은 조상에게 바치는 일을 의미한다.
▲ 다다미가 깔린 공양간 내부 풍경. 작은 둥근 테이블에는 불자이신 고두심씨의 싸인이 보인다. 이 밥상을 대하는 이 모두가 좋은 글귀도 같이 먹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하루하루 좋은날 되소서’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부처의 탄생, 성도(成道), 열반까지의 과정 그리고 많은 보살과 부처를 생각하고 자연과 뭇 중생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보살로서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는 거룩한 의식이라고 사전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 작은 법당 내부. 비구니 스님이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먹는 것도 수련이자 수행이기 때문에 법공양(法供養)이라고 하며 스님들이 하는 식사법은 ‘발우공양’ 여러 사람들이 함께 먹는 것은 ‘대중공양’ 차를 나눌 때는 ‘차공양’ 꽃을 제단 등에 올리는 것은 ‘꽃공양’ 이라고 부른다.
부처님 오신날 절에서 아침상을 받고나니 공양의 의미가 새롭다. 오후에는 서울 아차산 기원정사에서 열린 ‘산사음악회’를 찾았다. 비가 아침부터 쏟아지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인기있는 대중 가수들, 성악과 국악인들이 나와 법당 앞의 무대를 잔치마당 처럼 흥겹게 만들었다. 산사에서 대중가요, 판소리 그리고 칸소네를 들으니 또 다른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비가 내리는 야외무대 천막 아래서 들으니 소리나 가락은 더욱 운치있게 느껴졌다.
음악회에서의 백미(白眉)를 꼽으라면 사회자의 표현대로 ‘신이 내린 소리를 가진 소리꾼’ 장사익 씨의 무대였다. 검정고무신에 흰 모시한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 관중들 앞에 선 소리꾼 장사익 씨는 예의 그 관중을 압도시키는 폭발적인 열창으로 심금(心琴)을 울렸다. 노래 사이사이 양념처럼 들어간 그의 구수한 우스갯말 역시 남녀노소 관객들의 파안대소(破顔大笑)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 가운데 고운 얼굴의 비구니 스님이 주지 설봉스님이다. 장사익씨는 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5년째 산사음악회에 나서고 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부처님의 품안에서 모두가 하나되고 소통하는 좋은 날 되십시요” 라는 끝맺음 말과 앵콜곡인 ‘찔레꽃’을 듣고나니 이것은 그냥 노래나 소리가 아니고 ‘소리공양’ 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에서 먹은 밥 공양이 대중들의 배를 부르게 하고 힘을 줬다면 오늘 부처님 오신날 받은 ‘소리공양’은 그곳을 찾은 많은 이들에게 행복한 여운으로 그리고 좋은 기운으로 오래오래 남았을게 분명하다.
▲ 성악가족이 나와서 합창으로 노래 공양을 하고 있다.
▲ 일본 흥왕사(興王寺)에서 33명의 신도와 스님들이 기원정사를 방문해 산사음악회를 감상하고 있다.
비 님 오시는 날 장사익 씨의 소리 하나만을 쫒아 몇 시간 차를 타고 지방에서 왔다는 소용범 씨는 산사음악회에 온 보람뿐만이 아니라 “귀가 그리고 마음이 깨끗이 청소된 느낌”이라며 그 감동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총총총 공연장을 빠져 나갔다.
▲ 티벳불교의 지도자 달라이라마 성하의 사진이 공양간 입구에 걸려 있다.
소리꾼, 장사익 씨의 노래는 아마도 노래가 아닌듯 싶다. 특히, '아버지' 나 '찔레꽃'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후벼파는듯도 싶고 나아가 통째로 흔들어 버린다고나 할까? 소리를 넘어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 그리고 맑고 시원하게 걸러주는 느낌이 든다.
▲ 제목 Face. 2008/ 종이에 흑 연필심. 모델의 얼굴에서 왜 나는 경주 남산에서 봄직한 돌부처 상이 연상되는지 모르겠다. 모델이 잠이 든 모습이어서 그럴까?
산사음악회를 통해서 받은 좋은 기운과 낮춰진 마음으로 절을 나서면서 이 마음을 누구와 나눠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평소에 불심(佛心)이 깊으셨던 할머니 보살님 문병을 갔다.
이젠 내가 누구인지조차 전혀 못 알아보는 그분의 두 손을 꼬옥 잡고 “오늘이 부처님 오신날 이랍니다. 늘 좋은 날 되세요” 전하니 그분이 두 손을 모아 가지런히 합장(合掌)하는 예를 갖추시며 화답한다. ‘아이고, 부처님’
▲ 절 담벼락에 담쟁이 덩굴과 함께 보이는 ‘좋은 날 되소서’ 보살님의 좋은 날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