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맨해튼 45가의 한 사무실.
저마다 핑크빛 ‘스타의 꿈’을 안고 온 90 명 정도의 사람들을 보았다. 나이는 3살짜리 아이부터 60대 중반까지 남녀 비율은 얼추 반반으로 백인이 70%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나머지는 흑인과 남미계 그리고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하루에 세번 정도 진행된다고 한다. 우리 시간대에는 대략 90명 정도로 일반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더러는 아주 육감적인 몸매를 다 드러내고 과시하는 이들도 몇 있긴 했지만.
‘흉터가 있는지’ ‘문신이나 피어싱을 했는지’ 등의 상당히 자세한 신상정보를 기록하게 하더니만 인증샷 찍듯이 엉성한 아가씨가 한명씩 불러다가 사진을 한장씩 찍어 댔다. 한시간을 꼬박 더 기다리게 한 다음 설명회가 시작되었다.
▲대기실 복도에 일렬로 줄지어 걸려있는 사진들은 짐작컨대 그 에이전시를 통해서 나간 모델이나 배우들로 보인다.
자사의 방대한 규모와 연락망에 관해서, 모델이 되고 영화배우가 되려면 자사와 같은 에이전시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장황(張皇)하게 설명했다. 아무나 하겠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며 서류심사, 1차 인터뷰, 2차 오디션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 서류접수에는 꽤나 상당하게 피어싱을 했는지, 문신을 했는지, 큰 흉터가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신상정보를 적게 되어 있다. 20대 후반의 아가씨 둘이 서로 상의하면서 적고 있다.
또한, 그들 회사를 통해서 얼마나 유명한 모델과 배우가 나왔는지 또, 한건당 얼마나 높은 고수익을 올리는지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고 있었다. 사람들 눈동자가 더욱 반짝거렸고 9살 박이 꼬마가 한번에 올리는 수입이 9만달러 정도 된다는 대목에선 부러움 섞인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하였다. 이 대목에서 박수까지 하는 할리우드식 정서의 미국인들…. 정말 못 말린다.
▲ 설명회를 진행하는 사람이 자사를 통해 발굴된 어린이 모델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잘 나가는 어린이가 어른보다 월등하게 고수익을 올리는게 요즘 현실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이들을 대동하고 온 부모들이 많아서 놀랐다.
마지막으로 날린 멘트가 아주 압권(壓卷)이었다. “여러분 우리는 신선한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패션모델이나 유명 배우의 외모를 기준으로 해서 찾지 않습니다. 자신을 내보일 열정적이고 참신한 외모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신을 가지세요. 행운을 빕니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정말 사람들을 현혹(眩惑)시키기 이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을까?
지망생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지망생 모두가 나를 포함해서 예외없이 저마다의 핑크빛 환상에 이미 취해 있는듯 싶었다.
▲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왔다. 손주가 모델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소박한 바램을 보였다. 서류 접수한 사람은 무조건 사진 한장씩 찍게 되어 있다. 사진 찍는 아가씨가 패션 모델 뺨치는 화장과 치장을 하고 있다.
▲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하는 시간이 꽤나 지루하다.
▲ 내 앞 번호로 보이는 한 사람만이 남고 다 갔다. 내가 꼴찌로 인터뷰를 받으려는 모양이다.
인터뷰 약속은 오후 1시였지만 정작 이름을 부른 것은 오후 2시 반이 되어서였다. 30대 초반 쯤으로 보이는 이탈리아계로 보이는 사내가 사무실 책상 건너편에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몸에 꽉 끼는 엷은 셔츠 바깥으로 단련된 근육질 몸매가 드러나 보였다. 영화나 모델 직종과 연관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연출되는 느낌이 ‘느끼하게’ 그려졌다.
‘지미’(Jimmy) 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아주 삐딱하게 앉아서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다시피 거만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날 더러 의자에서 일어나 벽에 가서 붙으라고 했다. 예상밖의 상황이라 뻘쭘해졌다. 한마디로 몸을 위아래 쭉 훑어가며 인터뷰를 하겠다는 뜻이 접수되니 기가 막혔다.
다음은 질문과 답이다.
“어떻게 해서 오게 되었나요?”
“이 분야의 친구가 강력하게 소개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왜, 20세나 30세에는 도전 해 볼 생각을 안했나요?”
“이 방면에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지금 생각해보니 재밌을것 같아서요.”
“연기 경험이 있나요?”
“없습니다. 아, 초등학교때 연극반을 한 적이 있고 TV 방송을 한번 탄 적이 있습니다.”
“모델이나 배우로 캐스팅 되면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으신가요?”
(머뭇거리다가) “네. 그렇습니다.”
“아시안은 참 찾기 드문 경우인데 내일 일요일 오디션이 정해지면 올 수 있습니까?”
“아, 네.”
“모델 일을 찾습니까? 아님 배우 일을 찾습니까?”
(내 속 대답은 ‘잘못 왔네요. 영화 엑스트라 캐스팅인줄 알고 왔거든요.’ 였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상황만 된다면 둘 다 상관 없습니다.”
“모델이나 배우로 캐스팅 되는 것에 얼마나 무게를 두고 있습니까? 1에서 10까지 하나를 고르세요.”
“글쎄요.(속 마음은 이미 떠나고 없어서 한 1번에 해당되겠네요 라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지만 마음에도 없이) 7 정도.”
“오디션을 통과하면 포트폴리오 촬영이 필요합니다. 본인 부담이고 495 달러입니다. 지불 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까?”
(돈 내는게 있느냐고 전화로 물었을때 없다고 했는데 이건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단답형 대화이므로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내일이 일요일인데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오디션 받으러 올 수 있습니까?”
(인터뷰 따로 오디션 따로? 이건 뭐 따로 국밥이쟎아 생각하다가) “네. 가능합니다.”
“축하합니다. 내일 오디션 받으러 오십시오. 올 때엔 (지금 입으신 그런 옷 말고) 몸에 잘 붙는 단색의 티셔츠와 캐쥬얼한 블루진을 착용하고 오세요. 물론, 화장과 하이힐도 필수이구요. 그래야 사진이 잘 받습니다.”
내 이름과 일요일 오디션 약속시간이 적힌 메모를 건네는 것으로 인터뷰는 간단하게 끝났다.
속말로 ‘그러니까 뭐야. 인터뷰에 통과가 되었다는 거쟎아. 오디션을 보러 오라고 하는것을 보니..... 1, 2차 시험을 통과했다는 뜻이쟎아.’ 오디션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입력이 되고보니 난 이미 배우였고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참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었다. 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적어도 아시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무슨 영화를 가장 인상적으로 봤는지? 아니면 선호하는 배우나 모델이름이라도 대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영화나 모델 그 어느 분야에 대해서도 언급 한마디 없었다.
▲ 성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대기실에 10살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들만 해도 10명이 넘어 보였다.
10분도 안되는 그 인터뷰 시간 속에서 그가 가장 많이 할애(割愛)한 부분은 두가지였다. 인상적이었다고 말해야 할지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일 오디션에 합격하면 포트폴리오 작성을 해야 하는데 그 값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을때 잠시 멈칫 거렸더니만 이렇게 물었다. “Do you need more time?” 감 잡기로 ‘돈을 모으려면 시간이 필요한가?’ 를 묻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캐스팅 되면 경제적으로 가족이 밀어줄 수 있나요? 하더니만 구체적으로 누가 해주는지까지 물었다. “Who's gonna support to you?”
뭔지 모를 ‘무례한 인터뷰로 해서 기분이 확 잡쳤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에게 제안했다.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다. 무척 인상적이다. 이 사무실 분위기가 독특해서 그런데 사진을 한 장 찍어도 좋겠나” 라고 물었더니 현재 영화 촬영중에 있어서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서 안된다고 했다. “얼굴을 가려도 좋다” 했더니 그런 조건이라면 가능하다고 해서 ‘얼굴 가린 기념촬영’을 하나 했다.
▲ 나를 인터뷰 한 인터뷰어. 좀 반듯하게 앉아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로 하면 좀 좋지 않았을까? 꼭 저렇게 삐딱하게 기대 앉아서 사람을 시종일관 세워놓고 하는게 이 업계의 불문율인가 의구심이 든다.
그곳을 나오면서 비록 두시간 반이 넘는 시간을 쓴게 아까웠다. 그러나 나름 처음 해본 ‘연예계 입문’에 필요한 재미난 경험을 맛보았다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그 말도 안되는 오디션에는 절대 갈 일도 없고, 그날 모인 그 많은 평범한 지망생 중 그 누구도 절대 캐스팅 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미뤄서 알 것 같았다. 왜냐면 두어시간 대기하면서 옆 좌석 사람이 심각하게 해대는 셈을 들었기 때문이다.
▲ 설명회에 임하는 자세들이 퍽 진지하다.
▲아이들은 설명회 내내 그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장난을 치곤 해서 설명회가 가끔씩 끊기기도 했다. 아이들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굴해내서 그 재능을 살리고 싶은 온 욕구가 커서 온 부모들로 가득찼으면 좋겠다.
하루에 이렇듯 인터뷰가 2번에서 3번 정기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한명 당 내는 값을 총 따져보니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이라고 하던 대화 내용. 하루에 어림잡아 온 사람중 3분의 1에 해당되는 100명씩 그 촬영비를 내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이라고 했다. 사무실 대여비와 디지털 카메라 하나와 프린터기 하나만 있으면 되는 사업 아니냐며 그들은 머리를 쳤다.
▲ 평범한 여러분들이야말로 모델 에이전시에서 찾고 있는 얼굴들 이라는 설명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준 것 같다.
그들이 꼭 직접 촬영을 해서 만든다는 캠프 카드(Comp Card) 는 지망생의 전신, 반신, 상반신, 앞, 뒷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1인당 500 달러씩 내고 타투를 하거나, 머리나 신체의 조건이 바뀌면 그때그때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다행히 일이라도 시작할 수 있게 되면 매달 내는 회비가 따로 있다고 했다.
▲ 가족들이 와서 여럿이 한꺼번에 신청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나를 포함한 연예지망생들의 머리숫자만을 모아놓고 그 핑크빛 희망과 꿈을 담보로 해서 하는 ‘숫자놀음’. 그날 온 사람들 예외없이 100% 다 오디션을 통과했다고 들었다.
만으로 단 하루 꿈꿔본 연예지망생의 야무지고도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꿈. 나는 다행히 그 꿈으로 끝날 꿈을 하룻만에 버렸지만 그것을 못 버리면 에이전시 건물 들어올 때 전화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그 여성과 분명 같아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에이전시에 갖다 바친 돈이 지금까지 얼마인데 아직 단 한번의 기회도 없었다” 라며 소리지르던.....
한번 진흙속에 발이 빠지면 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때라도 빼야 진흙탕 속을 뒹굴지 않게 된다는 것을 한국의 젊은 연예지망생의 비극적인 종말(終末)이 말해주고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산다는 그 미국 여성이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의 돈 낭비를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Light Brown Figure/Watercolor/2008 핑크빛 꿈을 안고 ‘연예지망생’이 되려는 많은 이들에게 이 모델이 한마디 조심스레 권하고 싶은게 있다. 신중할것, 따져볼것 그리고 빨리 판단할것.
김치김 kimchikimnyc@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