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진돌이 엄마’ 를 만난지도 얼추 20여년이 되나보다. 막다른 골목길 안에 지어진 새 빌라로
이사들어간 날 밤 한 트럭분의 짐이 분실(紛失) 되는 사고로 한밤중이 되도록 이사가 끝나지 못했다. 화가 나고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피곤에 지쳐 나가 떨어졌는데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들린 소리.
‘컹, 컹, 컹 컹컹, 컹컹컹, 컹!’
‘이사한 첫 날 이 신새벽에 도둑이 들기라도 한걸까?’
조용하기 짝이 없는 주택가에서 느닷없이 울려퍼진 개 짖는 소리에 놀라 화들짝 잠을 깼다. 둘러보니 앞집의 한옥 마당
그것도 큰 감나무 아래 쯤 어딘가에서 나는것 같았다. 여간해서 듣기힘든 개 짖는 소리를 그것도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다 듣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시원한 정도를 넘어 쩌렁쩌렁 하기까지 했던 울림은 마치 ‘좋은 아침입니다. 속상하고 꿀꿀한 기분일랑 훅~ 날려 버리세요. 다시
한번 이 동네로 이사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건네는 이웃의 친절한 인사마냥 정겹기까지 했다.
'컹-컹-컹' 짖는 소리는 열 흘이 지나도록 계속되었고 매일 같은 시간대에 났으며 크고, 짧게 그러면서도 긴
여운(餘韻)으로 남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목청이 크고 명징(明澄)한 게 오래전 산사에서 들었던 새벽을 가르던 ‘도량석 치는 소리’ 같게도
들렸으며 호텔에서 받는 ‘모닝 콜(Morning Call)’ 처럼도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날 그 소리가 며칠간 들리지 않자 창문을 열고 앞 집 마당 쪽을 살피게 되었다. 마침 화분갈이를 하시던 주인과
창문을 통해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기에 “왜 오늘은 개가 짖지를 않네요” 라고 여쭈니 웃으시며 “이유가 궁금하거든 지금 바로 내려와봐요” 라며
손짓을 했다.
한달음에 쪼르륵 내려가니 조금 있으면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게 될것 이라며 큰 대들보가 걸린 대청 마루로 안내했다.
그 날 아침 거기 사시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와 마주앉아 모닝커피를 나누었는데 지금도 샘에서 퍼온 샘물처럼 신선하고도 빛바래지 않은 선명한 추억의
나이테로 남아 있다.
나이 지긋하신 모녀가 살고 있던 키 낮은 한옥에는 검소한 살림살이로 반짝거렸으며 보기드문 우물에 반질거리는 장독대가
있었다. 너른 마당에는 지천으로 야생화들이 피어 있었고 잘 자란 분재화분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한참 집구경을 하고 있는데 ‘낑~낑~낑’ 소리가 나서 가보니 흰눈이 앉은듯한 눈부신 털에 검고 촉촉한 코를 가진 진도에서
왔다는 6개월을 막 넘긴 숫 강아지가 낯선 방문객을 보고도 뭔가에 바쁜듯이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리 와보세요. 얘가요, 이 동네서 유명한 '진돌'이예요. 내가 너 때문에 창피해 죽겠다. 진돌아! 왜 그렇게 동네방네
광고를 해대는거야?.”
강아지때 부터 ‘큰 일’을 보고 난 후엔 빨리 치워달라는 뜻인지 어김없이 ‘컹컹컹’ 짖어대는 희한한 습관이 있는 진돌이가
요 며칠 짖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변비’때문이라며 저렇게 돌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있다 일을 볼 것 같다는 설명에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품을 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되어 소리가 났다.
‘컹~ 컹~ 컹, 컹 컹’
“해냈구나. 알았어. 금방 갈께!” 진돌이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쓰레받이와 빗자루를 챙겼다.
▲ 닳고 닳은 짤막해진 몽당빗자루는 검소하고 알뜰한
상징이자 진돌이 엄마가 마당쓸 때 제일 아끼는 도구이기도 하다.
첫 만남에서 지켜본 진돌이와 진돌이 엄마의 소통은 재미있음 그 자체였다. 아침이면 커피를 즐기시는 백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도 놀라웠고 성경책을 조용히 읽으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처음 본 이웃을 경계(警戒)없이 편하게 받아준 모습도 감사했고 언제든지 놀러와도 좋다는 ‘프리 패스(Free Pass)’
같은 허락까지 받고보니 그간 쌓인 이삿짐 센터에 대한 분노와 스트레스, 무례한 집주인으로 짜증났던 감정이 눈녹듯 사라지고 좋은 이웃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정이 들면서 조금씩 마음도 열리기 시작했다.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100세를 넘겨 장수하시던 할머니도 떠나셨고 진돌이도 사고로 잃었고 나 역시도 미국에
정착하면서 진돌이 엄마는 덩그마니 그집에 홀로 남았다. 그러다가 이번 방문을 통해서 새 집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에 만사를 제치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새 집 앞에 선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위용을 갖추었으되 과하지 않은 솟을대문, 동남향으로 안정감 있게 앉은 기단과 주춧돌, 편안한 용마루, 회벽과 서까래와의
균형잡힌 조화(調和), 암막새와 수막새가 편안히 앉은 지붕, 집의 규모를 가늠케 하는 상징인 지지들보인 육중한 대들보, 단아한 선의 처마,
맞바람이 치는 대청, 소담한 꽃담과 우아한 굴뚝, 반듯하게 깔린 대청마루, 잘 다져진 마당과 조촐한 장독대, 시원하게 들어올린 덧문들과 섬세한
이중의 창호문들, 고실고실한 온돌의 콩기름 먹은 장판지와 전통한지로 마감된 벽, 현대식 구조의 편리한 주방과 기능적 욕실이 잘 접목된 조화로운
상생(相生)의 한옥이 믿기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마치 예전에 살던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착각이 들 정도로 눈에 익은 모양새였다. 부모님과 살던 본래의 집에 기능적인
부분과 실용적인 부분들만 가미되어 한 단계 급과 격을 올린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넘치지도 않고 모자람도 없는 반가의 집 아니 ‘진돌이 엄마의
성품을 그대로 닮은 집’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마디로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고희(古稀)를 넘긴 연세에 더군다나 어려운 투병생활 속에 내색없이 젊은이도 쉽게 용기 낼
수 없는 일을 결단과 추진력으로 해낸 것이다. 두 손을 덥썩 쥐었다. “장하세요. 정말 큰 일을 해내셨어요”라는 인사에 진돌이 엄마는 “내가 한
게 아니야” 라며 정작 공신은 정작 따로 있었노라며 오래된 반닫이에서 소중히 보관해오고 있는 책 한권을 꺼냈다.
‘한식목조건축설계원론(韓式木造建築設計原論’ 1981년 민음사 발간)’ 으로 저자는 고 조승원 선생(1901~1987)으로
되어 있었다. 한국 전통방식과 현대적인 기술 접목을 시도한 설계와, 꼼꼼한 시공(施工), 감리(監理)를 했던 건축가인 그는 아직껏 우리나라에
전무후무한 전통 한식 목조에 관한 개요와 명칭 구조및 설계를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책 한권으로 집대성(集大成) 해놓은 방대한
자료였다.
▲ 고 조승원 건축가(1901-1987) 사람들은 그를
두고 근대건축에 한국의 혼을 얹은 이라고 부른다. 현재 서울 역사박물관에서는 7월 21일 까지 ‘한국 근대 건축전’을 통해 전통건축의 마지막
세대이자 서양식 근대 건축의 첫 세대인 그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 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이 책 속에는 평생을 한옥(韓屋)에 바쳐온 장인(匠人)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한식 목조건축에 관해서
우리 역사에 그리고 후손에게 남을 훌륭한 필독 교과서로 가르침이자 지침서로 그 무게가 고스란히 실린 중요한 책 임을 알 수 있었다.
▲ 조승원 선생이 손으로 직접 그린 한식 2층 목조
정면도(Facade). 옛 서울여상(1965), 삼청각(1972), 군산교대 도서관(1953), 서울 보성고등학교 (1955), 인천교대
본관(1956), 춘천교대 과학관(1958), 인천교대 부속 초등학교 교사(1959) 등 전통 뿐만 아니라 근대식 학교 건물등도 직접 설계 및
감리를 하였다.
학부에서 건축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부친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운 것도 아닌 평생을 미혼의 몸으로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奉養)하는데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진돌이 엄마가 이런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생활을 통해서 일상을 통해 부친으로부터
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차곡차곡 내공으로 쌓이고 가르침이 되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한눈에 봐도 이 집은 진돌이 엄마 자신을 위해서 지은
집이 아닌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아버지에게 바치는 아버지의 숨결로 지어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게 했다.
집을 완공하기까지 또 하나의 공신을 꼽는다면 한옥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통방식을 쫒아 만들겠다는 한옥전문 시공회사의
장인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성실하고 서두르지 않은 공정이 여러 복잡한 과정들을 무리없이 소화해낸 것으로 여겨진다. 으레
공사가 끝나고 나면 생기기 마련인 잡음과 불화는 커녕 ‘서로에게 공을 넘기는’ 미덕을 보면서 모름지기 결정적인 큰 힘은 공사를 맡긴 이와 맡은
이가 보여준 깊은 신뢰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서로의 생각과 방식을 존중하고 믿는 튼튼한 바탕이 없었더라면 길고도 복잡했던 공사를
이렇게 훌륭하게 끝내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근래 10년 사이 한옥에 대한 관심이 부쩍 일고 있다. 아니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긍정적이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날림공사와 기초가 없는 엉터리 겉핥기 식이나 보여주기 식의 공정들을 볼 때 마다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것들과 차별되어 정석으로 수순을 밟아 제대로 된 하나의 전통한옥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한옥을 한옥답게’ 이해하고 만들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의 영감(靈感)을 바탕으로 한 따님의 용기와 시공사의 섬세한 노력의 결실임을 힘주어 강조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다.
이렇듯 집이 완성되기까지의 역사와 경위를 찬찬히 알고나니 집이 다시 보였다. 현판을 올려다 보니 ‘시하장(枾下莊)’
이라고 쓰여 있다. ‘감나무 아래의 사저’ 라는 소박한 뜻으로 아버지가 옛집에 붙인 현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낮 밤을 달리하여 시하장에서 머문 3일. 비오는 날엔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정겹고, 해 쨍한 날에는 처마 아래의 깊은
그늘이 오수(午睡)를 불러왔으며, 흐린 날은 흐린대로 안과 밖의 경계 없는 한옥의 정취(情趣)가 유감없이 느껴졌다. 서울에 머무는 내내 집안일로
종종걸음을 쳐가면서 엉덩이 느긋하게 붙이고 친구와 차 한잔 나눌 여유조차 없이 지냈지만 이곳에 머물던 시간만큼은 구름이 잠시 쉬어간것과 같은
이치로 서울서 머물던 중 유일하게 편안했던 쉼으로 여유로움으로 추억이 되어 남았다.
자연의 흙, 나무, 돌이 빚어낸 조화로움의 산물인 한옥은 그냥 집이 아니다. 우리네 조상의 지혜와 슬기가 오랜 세월
검증(檢證)을 거쳐 완성된 종합예술작품이라고 해야 맞을성 싶다. 그런만큼 우리민족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전 세계로 그 우수성과 품격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고 체감되어지기를 열망해본다.
잠시 방문한 객의 입장이었지만 머무는 순간만큼은 집과 소통하고 편하게 느낀 것은 우리의 한옥이었기에 가능했다. 오죽 신이
나고 좋았으면 덩실덩실 춤을 다 추었을까! ‘우리집에 와서 처음으로 춤을 춘 유일한 사람’ 이라며 내 춤사위를 파안대소(破顔大笑)로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진돌이 엄마! 아무쪼록 새 터에서 좋은 기운을 받아 오래도록 강령하시고 편안하시길 빌어마지 않는다. 이제는 집을 가꾸는 일로 종종걸음
하는 일 없이 보다 지금 있는 자체를 맘껏 즐기시면서 사시길 바램할 뿐이다.
우리부부가 언제든 서울로 돌아오거든 집 한켠을 흔쾌히 내어주시겠다며 언제든 환영한다는 진돌이 엄마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왔다. 정말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지만 현실은 엄연해서 예정된 일정에 맞춰 뉴욕의 맨해튼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짐가방을 푸는데 ‘고무신은 철에 맞게 신어야 제 멋’ 이라며 흰 고무신과 겨울용 검정고무신을 각각 챙겨 넣어준 꾸러미가
보였다. 그러고보니 그 집 댓돌위에는 항상 크고 작은 고무신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시하장을 방문했던 첫 날엔 약속이라도 한듯 두사람이 똑같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어서 누구랄것 없이 서로의 고무신을
번갈아보며 푸실푸실 웃던 기억도 추억으로 남았다. 우리가 고무신을 신고 뉴욕 뿐 아니라 미국 전역을 활보할 때 마다 ‘진돌이 엄마’의 마음과
배려를 유감없이 느끼게 될 것 같다.
▲ 고무신 가게에서 양말을 나눠신고 흰고무신과 검정
고무신을 각기 신어보았다. 우연의 일치로 그 날 두사람이 같은색의 7부 청바지를 입고 있었던데다가 발 크기마저 똑같아서 막상 어느 쪽이
진돌이 엄마 발인지, 내 발인지 쉽사리 구별이 되질 않아 한참을 웃게 만든 추억의 사진.
나는 언제쯤이면 진돌이 엄마를 반에 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지…… 알뜰함과 검소함, 겸손함과 정직함, 강인함과 부드러움,
반듯함과 푸근함,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타인에 대한 넘치는 배려(配慮), 욕심없는 삶의 철학.......닮고 싶은게 너무 많다. 주제넘게
따라잡지는 못할지언정 흉내라도 낼 수 있어야 할텐데…. 갈 길이 멀고도 멀다. 이제 막 미국에 돌아왔는데 벌써부터 ‘시하장’에서의 추억들로
진돌이 엄마가 마냥 그리워지니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가슴앓이'인지 나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한옥 만세!
진돌이 엄마 만세!
▲ 제목 / Foot Croquis 2011 흙물 그리고
연필. 설명/ 오래전에 농삿일을 하면서 애용했던 고무신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 추억의 상징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흙 묻은 발로 신기에
고무신 만큼 편한 신발이 있을까! 그리고 비오는 날에 고무신 만큼이나 한국인에게 만만한 신발이 또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