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별르고 별렀던 미 원주민들의 축제 현장을 다녀왔어요. 미국서 살면서 궁금해질 때가 있었어요. 대체 원주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미국에 살면서 원래 주인인 원주민을 만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북미대륙의 원주민은 최대 1억명이 넘게 살았다는 설부터 최소 수백만명설까지 다양합니다만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대륙의 광활함을 고려하면 3천만명은 넘지 않았을까라는게 대체적인 통념입니다.
한때 미국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부릅니다만, 정작 미국에서는 거의 부르지 않습니다. 만약 인디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필경 인도인들을 칭하는 것일테니까요.
아시다시피 인디언은 유럽인들이 그들 기준에서 발견(?)한 신대륙을 인도로 착각(錯覺)한데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그전까지 동쪽으로 머나먼 육지길로 가야 했던 인도를 반대 방향으로 가도 나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개척의 루트에서 원주민들의 비극은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원주민(Native)’이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원주민 역시 유럽인들이 저들 기준으로 부르는 것이니까요. 그들은 고유의 부족이름, 나바호, 체로키 과라니 등으로 불리길 원하는데 외지인들은 다 똑같이 보이는 원주민들을 일일이 구별해 부르기도 쉽지 않겠지요.
이밖에 붉은 치장(治粧)을 한다고 해서 붙은 홍인종이라는 단어는 남미의 ‘인디오’처럼 경멸하는 단어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니 주의할 일입니다.
어쨌든 수백년전 적어도 3천만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오늘날 10분의1이하로 줄어든 것은 유럽서 온 정복자들의 무자비한 살인과 약탈, 그리고 더 무시무시한 전염병들때문이었습니다. 워낙 불결한 곳에서 살아 내성과 면역력이 있었던 백인과 달리 청정지역에서 수천년을 거주한 원주민들은 각종 질병과 바이러스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습니다.
뉴욕 등 대도시에서 원주민들을 보기 어려운 것은 이들이 극소수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륙의 소위 인디언보호구역에서 자치(自治) 형태로 살아가고 있기때문입니다. 허울좋아 자치지, 보이지 않는 수용소에 가둬놓은거나 마찬가지죠. 원주민들도 원래는 물좋고 먹을 것도 풍부한 동부 해안가와 가까운 숲에서 많이 살았지만 백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핍박받으며 안으로 안으로 밀려 들어갔고 종내는 척박한 내륙에서 쫒겨난것 아니겠습니까.
뉴욕에서 10년넘게 살면서 머리를 두갈래로 딴 원주민 남성을 처음 본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뉴욕의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본래 이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의 후예(後裔)들이 신기한 외국인마냥 눈길을 받게 된 것이 아이러니하고 애달프기도 했습니다.
원주민 보호구역은 미국전역에 310개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엔 202개의 원주민 부족들이 있다는데 대부분 보호구역 시설 내에서 주정부의 혜택으로 살아가고 학비는 무료이고 어른들은 마약을 하거나 음주, 사냥 등으로 소일(消日)하며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부보조로 근근이 먹고는 살지만 실업률이 80%에 달할만큼 직업이 없어서 이렇다할 희망이나 동기제공이 없는게지요.
보호구역에선 미국 연방법을 적용하지 않아 마약거래도 손쉬워 마약중독이 된 사람들도 많고 알콜중독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또 많은 보호구역에 카지노 시설들이 있는데 이것또한 연방법으로 규제되지 않은 이유도 작용합니다. 그나마 카지노로 인해 직업들이 생기고 재정도 충당하는 셈인데 도박업을 하거나 약과 술에 취해 살아가는 그들과 미 대륙을 자유로이 누비던 저들의 조상들을 비교하면 참으로 딱하기만 합니다.
10월 10일은 컬럼버스 데이로 미연방 공휴일입니다. 이날 컬럼버스를 기리는 화려한 퍼레이드가 맨해튼에서 진행되는데 비록 소수지만 이들을 향해 추모(追慕)의 배너를 든 이들도 볼 수 있습니다. 원주민과 그들의 처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말없는 시위입니다. 원주민들은 컬럼버스데이를 ‘미국립애도의 날’로 부르며 컬럼버스로 인해 미대륙의 원주민들이 대학살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미국의 초중고교에서도 컬럼버스로 인한 명암(明暗)의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원주민들의 투표권이 1930년에야 부여된 것도 놀랍지만 과거 원주민 탄압과 강제이주에 대해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가 오바마 대통령 취임 뒤인 2010년에야 이뤄진 것은 더욱 놀랄 일입니다.
미국의 주인이었지만 오늘날 찾아보기도 힘들어진 원주민들의 일단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원주민 파우와우 축제였습니다. 베어마운틴 지역에선 일년에 딱 한번 8월중 열리기 때문에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행사가 열린 뉴욕의 외곽 해리만스테이트 팍은 맨해튼에서 조지워싱턴 브리지를 건너자마자 북쪽으로 허드슨강을 따라 난 팰리세이즈파크웨이를 타고 40분쯤 올라가면 됩니다. 뉴욕시 북쪽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선 타판지 브리지나 베어마운틴 브리지를 타고 넘어오면 되구요.
축제는 주말인 6일과 7일 이틀간 거행됐습니다. 입장 하니 원주민의 텐트가 사람들을 맞이합니다. 잔디 광장 전면엔 넓은 텐트들이 있었는데 다양한 복장을 한 원주민 남녀와 어린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주최측에 따르면 라코타와 나바호, 모호크, 세네카, 체로키 등 북미대륙의 부족들은 물론, 아즈텍과 마야, 사모아, 하와이 등 원주민의 복장을 망라(網羅)했다고 합니다.
원주민의 후예들과 아티스트들은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계속하여 교대로 집단 군무(群舞)와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전통의상과 화려한 깃털등 장식으로 치장한 아티스트들은 팔월의 폭염이 무색할만큼 정열적인 군무를 펼쳤습니다. 사회자가 중간중간 설명과 박수와 환호를 유도하는 추임새도 넣더군요.
하지만 아티스트들의 외모에서 순수 원주민의 혈통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백인과 흑인 등 타민족과 혼혈이 되었기때문이지요. 더러는 원주민 예술을 배워서 활동하는 타민족 아티스트들도 있는 듯 했습니다.
무대를 바깥쪽으로 둘러싼 40여개의 부스에선 원주민 부족들의 다채로운 전통 수공예품들이 방문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 먹거리가 빠지면 안되지요. 식당 부스에선 버팔로 버거와 사슴고기스튜, 옥수수스프, 인디안 타코 등 원주민들의 전통 음식이 저렴하게 판매돼 종일 줄이 이어지는 등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뉴욕 일원의 원주민 축제는 9월 17일과 18일엔 웨스트체스터 요크타운하이츠에서 ‘파우와우 네이티브 아메리칸 페스티벌’이 열리고 10월 9일과 10일엔 뉴욕 맨해튼 건너편 랜들스 아일랜드에서 ‘인디저너스 피플즈 셀러브레이션’이 예정돼 있습니다.
축제의 흥겨움은 있지만 어쩐지 애잔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무참한 살육(殺戮)의 역사가 아직도 제대로 조명받지 않았고 원주민을 여전히 가둬놓으려는 미국 정부의 정책때문이겠지요.
여러분께서는 혹이 이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선량한 인디언은 오로지 죽은 인디언뿐이다)."
이것은 남북전쟁 직후 벌어진 대대적인 인디언 소탕(掃蕩) 작전을 주도한 윌리엄 테컴시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 장군과 필립 셰리던(Philip H. Sheridan, 1831~1888) 장군의 공동 발표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1865년 7월 율리시스 그랜트 사령관은 정부가 추진하는 철도 건설을 위해 셔먼 장군에게 평원의 인디언을 제거하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1866년 셔먼이 그랜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당시 백인들이 원주민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줍니다.
“우리는 인디언 도둑 떼가 철도 건설을 방해하거나 중단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수 족 인디언을 여자와 아이들까지 완전히 멸종시키는 보복 전쟁을 열심히 전개해야 합니다.”
셔먼은 휘하(麾下) 병력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인디언 마을을 공격할 때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구분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저항이 있을 경우에는 즉각 죽여라."
무고하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넋을 위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