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추억하면 먹을 것을 빼놓을 수 없지요.
특히 겨울에 생각나는 것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따뜻한 온돌방에서 웅크리고 있으며 주전부리하던 기억들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긴 가래떡 연탄이나 난로위에 올려놓고 구어먹던 생각도 나고 귤을 까먹고 뜨끈한 아랫목에 넣어두면 천연 방향 효과도 있구요. 바싹 마른 귤껍질을 사그라드는 연탄불에 올려놓으면 번개탄 비슷한 역할도 했지요.
겨울에 들리던 추억의 소리,,,"찹싸~알 떠~어~억...메~미이~일 무~욱" 이 있지요.^^
어둠에 잠긴 골목길에 울려퍼지던 그 소리가 하루는 어찌나 먹음직스럽게 들리는지 불러서 사먹어본 기억도 나네요. 근데 메밀묵이 막상 별로 맛이 없더라구요.. 도토리묵처럼 탱탱한 맛이 없어서인지..
동지날 팥죽도 빼놓을 수 없는 음식입니다. 아다시피 동지(冬至)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며 이날부터 낮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합니다. 농경사회에서 낮이 길어진다는 것은 농업을 위한 시간 다가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의미에서 동지를 축하하고 풍작을 위한 봄 농사를 준비하는 뜻에서 팥죽을 먹는 풍습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동지팥죽에는 찹쌀을 동그랗게 빚은 새알심을 나이수만큼 넣어 먹었는데, 이 때문에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도 있었다고 하지요.
붉은팥으로 끓인 팥죽에는 액운을 물리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팥죽을 끓이고 먹는 풍습은 잡귀가 가져오는 불운이나 전염병을 막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는데, 옛날 우리 선조들은 팥죽을 먹기 전에 집안의 사당에 팥죽을 먼저 올리고, 부엌, 창고, 대문, 마당 등 집안 곳곳에 뿌렸습니다.
팥죽은 기근음식이기도 했습니다. 과거에는 겨울에 쌀이 부족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본래 먹을게 없는데 입은 많고, 그러면 물을 넣고 죽을 쑤어서 먹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물로 배를 반은 채우는 셈이지요.
팥죽은 그런 효과와 함께 영양분이 충분히 들어간 훌륭한 음식이었습니다. 반찬도 별로 필요도 없고 시원한 물김치 하나 있으면 최고 식사였으니가요. 이렇듯 곡식도 아끼고 영양도 챙길 수 있는 귀한 팥죽은 고향의 향수와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기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민생활을 하다보면 한국의 세시풍속을 챙기기가 참 힘이 듭니다. 설이나 추석은 정말 큰 명절이니까 한인타운에서 함께 하는 행사들도 많고 하지만 단오(端午)라든지 동지라든지 절기속에 들어간 날들은 자칫 모르고 지나는 경우가 많지요.
동지 팥죽도 그런 점에서 참 먹기가 쉽지 않은 음식입니다. 그런데 뉴욕에서 해마다 동지 팥죽을 수백명의 노인분들에게 대접하는 분이 계세요. 바로 김정광 미주한국불교문화원장이신데요.
지난 22일 플러싱의 뉴욕한인봉사센터에서 한바탕 팥죽잔치가 펼쳐졌습니다. 이곳은 아침과 점심을 1달러 내외의 부담없는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이 주5일 제공되는데요. 한인노인들의 대표적인 쉼터입니다. 수년전부터는 플러싱에 중국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중국계 노인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날 훈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팥죽 한사발을 앞에 놓고 노인들은 감회(感懷)어린 표정이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살아가는 한인노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역시 고향의 맛이니까요. 설날이면 떡국을, 추석엔 송편을 먹으며 고향을 그리고 정담(情談)을 나누는 이곳의 노인들을 위해 김정광 원장은 지난 2009년부터 팥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뉴욕원각사 신도회장과 뉴욕불교신도회장을 역임하는 등 신심 깊은 불자인 그는 우연한 기회에 오래전 이민온 한인노인들이 고향을 떠나고 동지날이 되어도 팥죽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얘기에 깜짝 놀랐디고 합니다.
불자들은 동지날이면 절에 가서 팥죽을 먹을 수 있는데 종교가 다르거나 형편이 안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팥죽을 먹기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거지요.
김정광회장은 미동부 최초의 떡 한과 전문점 '예당'을 운영하는 사업가이기도 해요. 평소 떡과 한과 등을 한인노인단체 등에 많이 기부하던 터라 동지팥죽을 한번 대접해드리자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9년 동지날 불자들을 이끌고 KCS경로회관을 비롯, 코로나경로회관, 플러싱 커뮤니티 경로센터 등을 순회하며 무려 1200명의 노인들에게 팥죽을 드렸습니다.
첫 해 많은 노인들이 "이민온지 수십년만에 처음 먹어보는 팥죽이에요." "고향에서 먹던 맛과 똑같네요."라며 눈물을 글썽여 김정광 원장과 봉사하던 불자들의 콧등을 시큰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동지 팥죽 잔치가 햇수로 7년째가 되었습니다. 동지 며칠전부터 팥을 불리고 찹쌀 새알심도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이날도 김정광 원장과 함께 임춘택 불교문화원 이사장, 장미숙씨 최해근씨, 백주흥씨 부부가 아침 일찍 나와 봉사를 했습니다.
정성껏 쑨 팥죽을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맛 보는 노인들의 얼굴엔 행복감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올해 준비한 팥죽은 모두 600인분. 김정광 원장은 "동지날이면 이곳에서 팥죽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서 평소보다 더 많은 분들이 왔어요. 넉넉하게 준비하길 잘했네요"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이날 배식을 받는 분들중에는 중국 노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중국엔 우리와 같은 팥죽이 있을까요. 자료를 찾아보니 중국에도 '홍또우죠우'(紅豆粥)'라는 팥죽이 있다고 합니다.
따뜻하고 달콤한 죽요리를 뜻하는 '탕슈에이(糖水)'의 한 종류인데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지만, 여름에는 간혹 차갑게 먹기도 하며 남은 팥죽을 얼렸다가 아이스크림처럼 먹기도 한다는군요. 광둥지방에서는 저녁식사 후 디저트로 먹기도 하구요.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의 팥죽은 '시루코(汁粉)'라고 하는데 정중한 표현으로 '오시루코(お汁粉)'라고도 부릅니다. 주로 달게 만드니까 단팥죽인 셈인데 안에 모치나 밤조림, 찹쌀만두 등을 넣기도 합니다.
일본사람들도 겨울에 팥죽을 많이 먹는데요. 일부 지방에서는 설날 음식으로 먹기도 하구요. 보통 우메보시(매실장아찌)나 시오콤부(소금 뿌린 다시마) 같이 시고 짠 반찬과 궁합이 맞습니다. 일본의 팥죽이 아주 달아 쉽게 물리기 때문에 이런 반찬을 함께 먹어야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기때문입니다.
베트남에도 팥죽 비슷한 ‘쩨(chè)'가 있다는걸 처음 알았어요.얼음을 갈아 팥, 콩, 녹두, 땅콩, 연유 등을 섞어 차갑게 먹는 팥빙수같은게 더 흔하지만, 쩨는 팥죽처럼 뜨겁게 먹는다고 해요.
동지날 팥죽 맛있게 드시고 건강한 새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