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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뉴욕에서 1991년 문화이벤트사 ‘오픈 워크’를 설립한 필자는 20여년간 북미 지역에 한국 영화, 공연, 전시를 기획해 왔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을 비롯, 최은희, 김지미, 고은정, 박완서, 안숙선씨 등 쟁쟁한 한인 예술가들을 미 주류 무대에 알린 주역이기도 하다. 한인예술인부터 주류사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메이커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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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처음 본 순간

글쓴이 : 한동신 날짜 : 2011-12-30 (금) 17:01:52

“촬영현장에서 ‘액션!’ 또는 ‘컷!’이라고 악을 쓰지 않는 감독은 아마 클린트 한 사람 뿐일거예요. 그랬기에 나 역시 배우로서 연기했다기 보다는 감정의 리듬을 자연스럽게 탄 것 같아요.”

  

2003년,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미스틱 리버(Mystic River)’의 기자회견자리에서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숀 펜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영화계의 악동’이라 볼렸던 숀 펜이 영화 ‘미스틱 리버’에서 명연기를 펼쳐, 아카데미상 후보로 오르고, 흥분의 열기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을 향해 찬사를 퍼붓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숀 펜을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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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스틱 리버’는 같은 마을에서 자란 친구들의 사랑, 우정 그리고 배반이 남긴 상처를 그린 영화다. 기자회견에 동석한 팀 로빈스, 케빈 베이컨 역시 영화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배우와 스탭들과 나누는 돈독(敦篤)한 인간관계에 시간을 할애했다.

 

‘미스틱 리버’를 보고난 뒤, 프레스관계자들의 벌건 눈자위가 가시기도 전에 이른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기자회견장에 등장하자 영화평론가들과 기자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들을 환영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님, 숀 펜의 말처럼 현장에서 그렇게 조용하시면 어떡합니까? 와일드한 숀 펜이 겁나셨나요?”

누군가의 질문에 장내는 웃음소리로 흔들렸지만, 무대에 앉아 있는 노장(老將)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했다. 한동안 계속되던 웃음소리가 가라 앉자, 윤기나는 회색양복을 입은 은발의 신사,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감정이 ‘액션’, ‘컷’으로 컨트롤 될 수 있을까요? 진지한 배우들은 자신이 등장할 장면에 앞서 어느 구석에선가 이미 감정을 추스르며 연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감독의 역할은 배우들의 연기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를 알아채고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 것입니다. 따라서 촬영현장이란 바로 배우들이 역할에 몰두하고 있는 바로 그 코너입니다.”

 

우물거리듯 말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철학이 내 가슴을 후려친 날이었다. 아니,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며 그가 다시 보였다. ‘석양의 무법자’로 ‘더티 해리’로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때도 있었지만, 배우로 음악인으로 감독으로 제작자로 끝없이 ‘사람이야기’를 들려 주는 그의 에너지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영화보기에 게으른 사람들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이오지마의 편지’를 본 이후 영화관에 갈 이유가 생겼다는 말을 할만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 작곡가, 감독, 제작자라는 타이틀을 넘어 이제는 삶에 내공을 쌓은 완숙한 사람으로 우리앞에 서있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어른이었다.

 

새해가 되면 여든살이 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그 활동범위가 제대로 된 사람이야기를 담은 영화만들기이고 보면, 올 해나 새해나 내게는 변함없이 ‘제대로 나이들기’가 화두(話頭)가 될 수밖에 없을 것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될까?’

내게 수없이 던진 질문이다. 나이가 들고 있다고 스스로 느낄 때, 내 자신에게 더욱 더 가혹하게 물었던 질문으로부터 이제는 조금 자유로와 졌다.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던 나의 성장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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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 맘때가 되면 놓치지 않고 줄기차게 보았던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비로소 나는 해방되었다. 오마 샤리프의 그윽한 눈매, 광주리만한 입매도 멋있고 치렁치렁한 금발에 터틀넥 스웨터가 인상적인 쥴리 크리스티의 운명적인 사랑의 극치(極致)를 수놓은 장면들, 눈으로 덮인 러시아에 매료되어 해마다 보았던 ‘닥터 지바고’를 언제부턴가 보지 않고 도 한 해를 넘길 수있다. 눈발 날리는 동지 섣달에 국제극장이나 대한극장을 가 본지가 어느 새 30년 전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미국에 사는 코리안-아메리칸이고, 무엇을 해도 몸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기만 했던 미국생활이 이제 한국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을만큼 미국은 내 삶의 터전이 되었다. 영화 ‘미스틱 리버’는 이제 내게 미국영화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보이지 않게, 또는 두드러진 상처가 있는 영화 속의 인물들을 보면 동서양 어디에서 살던지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공감대로 사무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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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을 끝내고 아우성치는 기자들 사이를 빠져 나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의 뒷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가 만든 첫 작품,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서 보았던 모습이 선명했기 때문일게다. 그 영화를 본이후에 나는 몇 날 몇 일 우울했었다. 영화에 흐르던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에 푹 빠져 지냈던 날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은 ,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사랑만큼 만만치 않은 내 인생의 마무리에 대해 묵상(黙想)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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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걸으며 사라지던 노장의 뒷 모습에는 마치 추수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농부의 뒷모습처럼 홀가분하다.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에 들었던 ‘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를 들었던 이래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늙고 싶다. 마냥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정말 빈 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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