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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뉴욕에서 1991년 문화이벤트사 ‘오픈 워크’를 설립한 필자는 20여년간 북미 지역에 한국 영화, 공연, 전시를 기획해 왔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을 비롯, 최은희, 김지미, 고은정, 박완서, 안숙선씨 등 쟁쟁한 한인 예술가들을 미 주류 무대에 알린 주역이기도 하다. 한인예술인부터 주류사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메이커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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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인생’ 임권택

글쓴이 : 한동신 날짜 : 2010-10-16 (토) 06:39:24

“왔다는 말은 지~인자악부터 들었는데에...이거 참...”


늦은 밤, 임권택 감독님은 내가 묶고 있는 호텔로 전화를 주셨다. 2004년 겨울, 현대미술관(MoMA)과 추진하고 있는 ‘임권택감독 회고전’에 앞서 서울에 머물며 영화관계자들과 최종 작업에 분주했을 무렵이었다.

 


“그 호텔 18층에 있는 일식집에서 만나세. 아니여, 아니여...내가 올라가는 것이 도리일 것같어.”그 때 마침 ‘하류인생(下流人生)’을 촬영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감독님을 뵈러 내가 간다고 하자 촬영을 마치고 밤 늦게라도 내가 있는 쪽으로 오시겠다고 하신다.

늦은 밤에 일식집에 감독님이 도착하자 종업원들은 몰려 나와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화려한 꽃꽂이로 장식된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하자, “나는 날이 쌉쌀허니 따뜻한 정종이면 될 것같고, 어이...이 손님에게는 최고급 요리는 모조리 갖고 오시오” 하신다.

“아이고, 감독니임~ 저 그렇게 많이 못먹어요. 게다가 이 늦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음식을 시키시면...” 하는 내게, “이렇게 밖에는 내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여 내가. 내 일하느라 먼 걸음한 사람이 혼자 욕보는 것 같아 영 맘이 쓰이긴 하는데 당최 몸을 뺄 수가 있시야지...”로 어눌하게 말끝도 맺지 못하는 감독님의 진심(眞心)이 뼛속까지 전해 왔다.

어쩌면 한국현대사와 영화사의 근간(根幹)을 이룬 사람들의 얘기일지도 모를 ‘주먹세계’를 그린 “하류인생의 라스트 씬이 영 내 직성에 풀리질 않어”하며 감독님이 먼저 내게 정종을 따르셨다.

“장장 60년대부터 거슬러 올라 가며 영화를 찍자니, 촬영세트장에 들어서면 옛날 사람들도 생각나고 내가 지나 온 세월도 떠오르고, 참 거친 세월 오래 살았구나하는 감회(感懷)로 영화를 찍고 있네 요사이…”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영화판에 들어섰던 임권택 감독 - 그야말로 영화계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국민감독’이 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좌익 집안출신’이라는 악몽에 시달리며 새마을운동을 장려(獎勵)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감독으로서의 갈등과 아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나라를 떠나야 겠다고 마음을 굳힌 적이 있었지. 말도 안되는 영화법으로 사람의 손발을 묶지를 않나, 영화를 만들고 나면 기도 안찰 꼬투리를 붙여서 상영금지를 내리질 않나. 쓸 만한 사람들은 서리맞아 운신도 못하는데 ‘그저 분부만 내리십시요’하는 사람들 쪽에 서서 나도 영화를 만들고 있었지만 못 견디겠더라구.”

어린 시절 무작정 가출하여 미제 군화를 팔면서도 희망이 있었다는 감독님은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면 넘칠만큼 혜택을 주던 70년대를 가장 혐오(嫌惡)하고 있었고, 그 당시 용기 없던 자신을 용서하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다.

“내가 아무리 세상 돌아 가는대로 휘둘리고는 있었지만, 근본이 내가 싫은 일은 못하는 못하는 사람이야. 새마을 영화를 만들 때도 ‘그래, 이왕 하는 일, 재미있게 하자’ 했지만 그래도 법이라는게 사람 목을 너무 조르니까 이 나라를 떠나고 싶더만.”

임 감독님은 스스로를 ‘토종 중에 토종이라 딱히 갈 곳 없었던 촌 놈’이라고 하셨다.

“그게 참 이상해. 그저 다 포기하니까 저절로 힘이 생기는 이치가. 누가 뭐라든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한 편 만들고 이 판을 떠나도 떠나자하는 오기(傲氣)가 생기더라구.”

  

벼랑에 선 심정으로 감독님이 만든 영화가 ‘만다라’다. 원작을 바탕으로 임 감독님의 절규라 할만큼 치밀한 자기 성찰(自己省察)로 재구성한 영화 ‘만다라’는 한국의 액션감독 임권택을 세계적인 명장의 반열(班列)에 올려 놓았다. 떠나고 싶었던 나라의 가장 근원이 되는 정신을 길어 올린 영화 ‘만다라’가 감독님을 주저 앉혔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기자들이 내가 언제부터 감독이 될 꿈을 꾸었냐고 거창하게 묻는데, 내가 무슨 감독이 되기를 꿈 꿔? 부산에서 군화를 팔 때도 매일 손해만 봤는데. 영화판에 가면 실컷 밥은 먹여 준다기에 하여간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을 했어.”

꽤 늦은 시간인데도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감독님의 허름한 외투와 성성한 은발(銀髮)에 눈물이 핑 돌아 고개를 숙이는 나를 감독님이 안아 주셨다.

“어이구, 뉴욕에서 제일 씩씩한 사람이 울긴 왜 울어? 뉴욕하면 밝고 활기찬 사람들의 표정이 제일 기억에 남아. 그럼, 그럼 모두 웃으며 살아야 하는 게 사람 사는 이치인데. 내 일을 한다고 먼 길을 마다않고 온 사람을 이렇게 보내니 내 마음도 영 허전하네.”

 

지난 10월 3일, 한국의 영상자료원에서 ‘임권택감독 전작 회고전’을 마치고 환한 웃음과 경쾌한 걸음으로 극장을 나서는 임권택 감독님의 모습에는 6년 전, 외국에서 고생한다며 나를 격려하던 훈훈한 사람냄새가 여전히 풋풋하게 배어 있었다.

장거리 달리기에 지치지 않고 달려 온 임 감독님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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