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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뉴욕에서 1991년 문화이벤트사 ‘오픈 워크’를 설립한 필자는 20여년간 북미 지역에 한국 영화, 공연, 전시를 기획해 왔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을 비롯, 최은희, 김지미, 고은정, 박완서, 안숙선씨 등 쟁쟁한 한인 예술가들을 미 주류 무대에 알린 주역이기도 하다. 한인예술인부터 주류사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메이커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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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

글쓴이 : 한동신 날짜 : 2010-12-28 (화) 14:32:38

폭설주의보가 내리고 일찌감치 모든 일정을 접은 뒤에 먼지 앉은 ‘설국’을 뽑자니 뒤에 겹쳐 있던 다른 한권의 책이 툭 떨어진다.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나라 만신(萬神)’으로 불리는 김금화 선생의 자서전이다.

책표지에 한복을 곱게 입은 김금화 선생의 미소로 양 볼에 패인 보조개가 선명히 드러난다. 김 선생의 사진을 보자 가슴이 뜨끔하게 아려왔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뒤에 용서를 빌지 못한 채 세월에 묻어 버린 사람이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난듯이.

김금화 선생을 만난 것은 1999년이었다. 뉴욕에서 서해안 풍어제(豊漁祭)를 열어 보자는 기획으로 서울에 가서 친하게 지내는 설치작가 전수천 씨의 안내로 김금화 선생을 별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문동에 있는 김 선생의 한옥에 들어 서자 다정한 황해도 억양으로 반겨 주시던 그 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후리후리한 키에 고운 자태로 집에 찾아 오는 이들을 한결같이 복덩이로 맞으시던 분이다.

따뜻한 차와 함께 무속에 관한 서너 권의 책을 들고 오신 선생은 당신의 자서전,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의 첫 장을 넘기며 몇 자 쓰신다.

“한동신 대무당-소원 성취하소서!” 나라만신 면전에서 ‘대무당’이 된 내가 어떻게 처신할 바를 몰라 쩔쩔매자 “나라만신을 뉴욕에 데려가 굿을 하시겠다고 나를 찾으셨으니, 나보다 더큰 무당이 아닙니까?”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그랬다. 김금화 선생의 큰 맥인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을 공연으로 추진하겠다고 덜렁 계획서만 들고 갔지, 굿에 대해 어설프게 알고 있는 내게, 선생은 무수한 사진과 자료를 보여 주시며 상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강과 바다에서 펼쳐지는 풍어제는 그야말로 장관이라 공연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판단아래 기획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굿도 굿이거니와 의상, 그림, 음악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어서 호텔에 돌아와 기획 전체에 궤도수정을 대대적으로 해야 했다.

 

배연신굿에 동원되는 무속인(巫俗人)들을 모두 뉴욕에 초대해야만 제대로 된 공연이 되겠다고 벼르며 판을 짜자니 예산은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대여섯배로 껑충 뛰었지만, 허드슨강에 펼쳐질 환상적인 풍어제를 상상하자면 겁날 것도 없었다.

안봤다면 모를까 제대로 된 굿을 이미 보았기에 돈 때문에 규모를 줄여야 한다면 차라리 모두 접어 버려야지..하는 배짱까지 생겼다. 뉴욕에 돌아와 이미 후원의 뜻을 비쳤던 굴지의 회사들에게 다시 만든 예산을 보내고 허드슨강 관계자 및 한국무속에 관심있는 대학교수들과 박물관 큐레이터들과 미팅을 하며 분주하게 돌아 다녔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듯 했다.

 

그러나 가장 믿었던 굴지의 맥주회사와 음료회사로부터 공연의 후원이 어렵다는 편지를 받으며 암초에 부딪힌 것을 직감했다. 허드슨 강에 펼쳐질 굿인만큼 한인사회에 대한 홍보 마케팅 효과를 기대했던 이들은 한인사회의 대다수인 교인들의 반응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에 따라 후원을 보류(保留)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회사의 판단이 그러하다는데 우길 재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굿의 규모를 축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다시 기운을 내어 기획서를 여러 군데 밀어보자는 결론과 함께 김금화 선생께 전화를 드리니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주시고, 내게 벅찬 짐을 지워 주신듯 안쓰러워 하셨다.

하지만 내게 쌓여 있는 영화 및 다른 공연기획들로 인해 배연신굿 공연은 자꾸 뒷전으로 밀려 추진되지 못한 채 묻혀 버렸다. 비록 뉴욕에서 공연은 펼쳐지지 않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일본문화센터와 연결하는 다리구실을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고, 그것을 계기로 2003년 링컨센터가 주최하는 여름축제에 초청되어 오신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마침 해외출장으로 뉴욕에 오신 김금화 선생을 뵙지 못한 내가 얼마나 서운하셨느냐고 나중에야 전화로 안부를 대신하자, “큰 일하는 사람이 대범해야지 사소한 일에 신경 쓴다”고 운을 떼시며 선생은 오히려 내 건강을 염려하셨다.

모진 풍파(風波) 속에서도 ‘금화(錦花)’라는 이름처럼 비단으로 정성스럽게 꽃을 만들어 주고 싶다. 그 분의 마음이 폭설이 내린 오늘, 추위에 꼿꼿하게 비단 꽃으로 피어난다. 고사떡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시던 김금화 선생의 그 넉넉한 손이 그리워진다.

“복을 나누며 살다보면 한은 저절로 풀린다”고 말하던 한 여인의 지혜(智慧)가 닫힌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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