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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신의 사람이 있었네
뉴욕에서 1991년 문화이벤트사 ‘오픈 워크’를 설립한 필자는 20여년간 북미 지역에 한국 영화, 공연, 전시를 기획해 왔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임권택 감독 회고전을 비롯, 최은희, 김지미, 고은정, 박완서, 안숙선씨 등 쟁쟁한 한인 예술가들을 미 주류 무대에 알린 주역이기도 하다. 한인예술인부터 주류사회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뉴스메이커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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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정혼남 거절..조선의 마지막 공주..<下> 한동신이 만난 사람

글쓴이 : 한동신 날짜 : 2012-03-18 (일) 16:37:53

유학을 올 때 그의 나이 26세, 당시로서는 이미 婚期(혼기)를 넘긴 그가 어떻게 혼자 한국을 떠날 수있었는지 궁금해 졌다. 특히 왕가의 자손으로 결혼하라는 압력은 없었는가를 묻자, "16세에 나몰래 의친왕이신 아버지가 정혼한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직접 찾아가 '부모님이 정한 이런 식의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을만큼 결혼에 대한 확고부동한 나만의 소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니 ‘1956년에 유학길에 올랐다’에요, 유학 역시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 이화대학을 졸업하시고 전쟁을 겪은 이후, 1956년 텍사스에 있는 메리 하딘 베일러여대로 유학길에 오르셨을만큼 학구열이 대단하셨나봐요?

 

▲ 이화여대졸업식에서 이해경여사(왼쪽)

이: 학구열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제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도망치는 심정으로 한국을 떠났어요. 제가 미 8군 도서관에서 일할 때, 미 8군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데이빗 스트릿맨이라는 군인이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몇가지 조언을 해주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그 후, 침례교 목사인 데이빗의 아버지가 침례교학교인 메리 하딘 베일러여대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유학갈 수있도록 후원자가 되어 주었기에 미국에 올 수 있었어요.

 

▲ 왼쪽의 키가 큰 군인이 데이빗 스트릿 맨씨,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이해경여사

어머니가 사주셨던 야마하 피아노를 팔아 비행기값 650달러를 치르고 남은 돈 80달러를 들고 왔어요. 그리고 제가 미국에 올 때, 어머니가 주신 어머니의 원삼과 치마, 저고리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최근에 경기여고에 기증했습니다.

 

▲ 의친왕비가 주신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기념 촬영을 했다

그 때 도움을 준 데이빗과는 계속 연락하며 지냅니다. 현재 노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에 제가 노스 캐롤라이나에 다녀 왔어요.

    

▲ 데이빗 스트릿맨씨(왼쪽)

한: 1956년에 메리 하딘 베일러여대에 한국학생이 있었나요?

이: 그럼요, 3명의 여대생이 있었는데, 아주 친하게 지냈어요. 중국여학생들이 많았어요.

  

 

▲ 메리 하딘 베일러여대의 친구들과

한: 뉴욕엔 언제 오셨어요?

이: 텍사스에서 공부하면서 방학 때마다 뉴욕에 일하러 왔었지요. 다른 학생들도 방학 때가 되면 일자리가 많은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지로 갔습니다. 저는 김자경선생님에게 배운 첫번째 제자중에 한사람입니다. 그 때 김자경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오셔서 공부하시면서 여름방학이면 롱아일랜드에서 일하셨어요.
 

저보고도 그 곳에 있는 한 모텔에서 방을 치우는 일을 하라고 하시기에 갔더니, 창고에서 베드를 피고 자라고 하기에, 밤이면 파도소리를 들으며 잘 생각을 하니까 내 신세가 너무 처량하더라구요. 그래서 김자경선생님께 못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웃으시며 “네가 아직도 고생을 덜 했구나”하시면서 기차값 10달러를 주시기에, 다시 맨해탄의 김자경선생님의 아파트로 돌아와 지내면서 식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 김자경선생님과 제자들

한: 그러면 뉴욕에 살기 위해서는 언제 오셨어요?

 

▲ 메리 하딘 베일러 여대 시절(왼쪽)

이: 1959년 메리 하딘 베일러여대를 졸업하고 계속 음악공부를 하고자 뉴욕에 왔어요. 그런데 맨해튼 음대대학원에 입학허가를 받고도 등록금 365달러가 없어서 진학을 못했습니다. 막상 뉴욕에 와서 생활비를 벌며 음악공부를 하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백화점, 보육원에서도 일하면서 마침 린든 존슨정부가 외국인이라도 미국 대학을 졸업하면 영주권을 주는 법이 통과되어 영주권을 받았어요. 그 무렵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동양학 도서관에 새로 생긴 한국학부서에 직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취직을 할 수 있었죠. 한국학부에는 컬럼비아대학에 다녔던 한국학생들이 기증한 한국책이 꽤 많았고, 도서를 정리하면서 아무래도 역사책에 제일 관심이 많았어요.


▲ 1996년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일했던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게다가 우리가 자랄 때는 일제시대라 한국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기에 역사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신 기록들을 간간히 보며,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남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항상 주색에 빠져 無爲徒食(무위도식)으로 사는 타락한 분이었는데, 아버지가 버지니아 로어노크대학을 다니실 때, 당시 그 학교를 다니던 김규식선생과 절친하셨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 떠나실 때, ‘대한민족대표 의친왕 등의 독립선언서’를 공표했다가 용산 조선군사령부로 끌려가 취조를 받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아버지에 대한 서술이 낯설어 보이기도 하지만, 역사가 조선말기를 무능하고 부패한 것으로 서술한 것을 전부로 알고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핀 기운을 모아 쓴 책, ‘나의 아버지 의친왕’을 1996년에 발간했죠.

 

한: 아버지에 대한 재발견이 최근들어 조선황실에 대한 강연을 하시거나, 활발하게 역사바로잡기운동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가 되었나요?

 

이: 그럼요. 아버지에 대한 역사의 기술뿐만 아니라, 제 스스로 오랫동안 제 출신이나 성장배경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사는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제가 의친왕비와 함께 유일하게 궁궐에서 살았기에 궁궐생활을 또렷이 기억하는 산 증인이 되었네요.

 

저의 강연이나, 역사 바로잡기에 참여하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생을 마치기 전에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이라도 정확하게 전달하여, 역사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꼭 좋은 면을 강조하자는 것은 아니고,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그동안 강연을 하시거나 역사바로잡기에 적극 참여하시면서 얻는 보람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 결국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겠지요. 가까운 예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이미 학계나 전문가들로부터 고증이 된 부분이 상업적으로 과장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죠. 그리고 제가 아는 왕실은 사치스러운 곳이 아닙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집안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는 왕실은 검소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보면 흥미나 흥행위주로 제작되어서 궁중 의상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거나 법도에 어긋나게 과장된 부분이 많아요.

  

역사란 작고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 뒤틀리기 시작하면 전체 왜곡되고 맙니다. 우리의 역사를 재정립하는데 대한민국이나 국민이 모두 매진하기를 바랍니다.

한: 장시간 좋은 말씀을 나눈 것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개인적인 질문을 해도 될까요? 독신으로 지내신 이유가 있습니까?

  

이: 굳이 독신을 고집한 적은 없어요. 결혼을 안했을 뿐이지 젊었을 때는 데이트도 했어요. 그리고 40대에 만난 데이빗 사피로와 그가 2009년 세상을 뜰 때까지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둘 서로 의식적으로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놓기를 피했던 것 같아요.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아내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었고, 저는 자라면서 결혼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심했던 것같아요. 그러나 데이빗과 보낸 지난 40년은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 데이빗 샤피로와는 40년간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다.

한: 지난 날을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이 있으세요?

이: 후회하자면 후회할 일 천지겠지요. 그러나 이제껏 사는 일이 바빴고 제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내 인생에 별 후회는 없어요. 정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항상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던 음악공부에 대한 집착도 1973년 카네기 홀에서 연인 데이빗의 피아노반주에 노래했던 리사이틀을 마치면서 끝냈습니다.

 

 

그리고 85년에 테너 이인선 추모음악회로 국내 무대에 서기도 했고, 지난 10년동안 뉴저지에 있는 FGS커뮤니티센터에서 노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어요. 성격때문인지 무엇을 움켜 쥐고 싶다라든가, 굳이 떨쳐 버리고 싶다는 욕심이나 집착이 없습니다. 행, 불행은 왔다 가는 것, 항상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한번 잡으면 내 안의 깊은 곳에 安住(안주)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잡기란 아주 힘이 들죠. 그래서 저는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특별한 신분으로 살아온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기억하고 싶지 않을만큼 아픈 상처도 있고, 지워 버리고 싶은 추억도 있지만, 어찌보면 축복받은 삶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왕실과 역사를 증언하고 사는 요즘, 비로소 제가 누구인지, 제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워요. 많이 편해졌습니다.

 

<에필로그>

이해경선생과의 인터뷰는 총 20시간이 걸렸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올해 82세인 그의 삶을 20시간에 담기도 쉽지는 않겠거니와, 한국근대사를 특수한 신분으로 넘나든 그의 삶이 한국전쟁 전후나, 미국으로 유학을 온 이후, 지역이 바뀌면서 뒤바뀐 환경에 살면서 그의 심리 역시 상당히 복잡했다. 그 복잡하고도 미묘한 위치나 심경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이해경선생의 말솜씨는 가히 감탄할 경지에 이른다.

  

1930년생이니만큼 우리말보다 일어를 더 많이 썼던 시대를 살고, 유학을 와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영어로 말하며 살았던 그가, 장시간의 인터뷰에 영어나 일어가 전혀 섞이지 않은 그야말로 바른 ‘순서울말’로 ‘사실(fact)’을 정확하게 짚어 주었다. 말솜씨만큼 놀라웠던 것은 그의 기억력인데, 의친왕비와 20년을 사동궁에 살며 보고 배운 궁중의 법도나, 의상과 음식, 그리고 가족관계 등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의친왕과 의친왕비의 다섯째 딸이었던 이해경선생은 지난 50여 년간 줄곧 맨해튼 업타운에 있는 원베드룸에서 살고 있다. “인터뷰라기보다 지난 세월 가슴에 맺혀 있는 얘기를 다 털어 놓으세요”하며 만난 내게 “한 때 이렇게 태어난 내 운명이나 환경에 원망도 했지만,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에 취직을 할 수 있었기에 역사책을 제대로 읽고, 이제는 역사와 왕실을 증언하고 사는 나의 말년에서 내 인생을 돌아 보니 축복된 삶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내게 다시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웃는 자’의 당당한 모습을…’

뉴욕=한동신특파원 dongsinhahn@gmail.com

 

▷ 사진촬영=백평훈 감독

2001년 도미하여 텔레비전과 미디어를 전공하고 순수미술과 멀티 미디어의 관계를 실험하는 감독이다. 인간의 ‘순수’를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영상작업을 하는 백평훈감독의 작품은 Tribecca Cinema, Paramount Theater, Chelsea Cinema, MOCA Museum, Flea Theater등에서 상영되었으며, ‘Korean Independent Film Festival,’ “Asian-American Film Festival”과 같은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Body language가 주는 정직한 언어에 강렬한 영감을 받아 “Bodylogue’라는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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