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상상을 해본다.
꿈속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멋진 드레스를 입고 멋드러지게 높은 힐과 핸드백을 우아하게 살짝 허리에 끼우며 아카데미상을 받기
위해 수많은 팬들 앞에서 멋진 남성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리무진에서 내리는 모습을...
이런 꿈같은 일들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매트릭 댄스 파티가 바로 그런
환상의 잔치다.
한국으로 치면 고3. 학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케이프타운에서는 1학기 방학을 하기 전 날, 매트릭 볼 댄스 파티가
있다. 고3생들이 마음껏 끼와 멋을 발휘 할 수 있는 이 행사는 댄스파티를 중심으로 비포(before) 파티, 메인 인 댄스 파티,
애프터(after) 파티로 이어지며 하루종일 진행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모두 마치고 5년전 남아공에 건너 온지라 문화의 차이는 어쩔 수 없나보다. 듣도 보도 못한
매트릭 파티는 허례허식(虛禮虛飾) 같았고 하루를 즐기기엔 너무 사치스럽고 공부에 방해만 된다는 생각에 못마땅했다.
머리에 수건을 둘러매고 책상에 앉아 입시 전쟁을 벌여야 할 고3 학생들이 댄스 파티를 위해 드레스를 디자인 한다구? 고작
하루 행사를 위해, 드레스를 사거나 렌탈을 하기 위해 몇만 랜드, 적어도 수천 랜드를 소비하며 쇼핑하기를 몇 날, 며칠을 허비하다니.
까다로운 학생들은 드레스 쇼핑과 드레스가 완성되기 전까지 근 두 달을 매진한다. 우리 딸 같은 경우도 꼼꼼한 성격 탓에
자동차 기름값 만으로 드레스를 사고도 남았을 법했다.
그 뿐인가, 드레스에 걸맞는 액세사리, 구두, 목걸이, 핸드백까지 모두가 어울려야 한다며 같은 색깔, 같은 분위기로 코디
메이크를 한다. 헤어 스타일, 디자인, 가벼운 화장도 아닌, 마치 신부화장급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매니큐어와 네일 역시 그 날은 예외일
수가 없다.
남아공 현지인들은 매트릭 볼을 위해 이해와 사랑, 관용속에 아낌없는 부모의 지원에 익숙해 보인다. 쇼핑 자체를 즐기지
않는 나로선 여간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남성적인 성향인 나와 달리 딸은 작은 것 하나까지 섬세하게 따져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위한 댄스 파티 비용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많게는 몇 천만원을 쓴다는데.. 리무진을 대여해서 오는 것은
다반사이고 심지어, 헬기를 타고 레드카펫에 도착하는 커플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파티로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한 것이 있다면, 자동차에 광택을 내기 위해 한
번 더 세차했던 것이 엄마로서 할 수 있었던 성의였다.
고3생으로서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시험이 얼마나 중요한데..시험 기간 중에도 헤어 스타일을 땋기 위해 밤을 새워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해보며 마치 미용사 자격증 따려고 밤 새워 연습하는 것 같았다.
학교 시험 공부도 이렇게 밤 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이런 매트릭 댄스를 위해 몇 날을 밤새운다면 한국의 어느
고3 엄마가 애타지 않을까. 대체 왜 매트릭댄스를 고3에 하는건지. 고2 연말쯤 행사가 있으면 좀 좋아? 하고 불평도 늘어 놓았다.
매트릭 준비를 위해 밤을 지새는 모습을 보니 밤 새워 열공의 가능성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0대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인생를 걸다시피 온 정열과 시간을 쏟는 걸 보면 이해하다가도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야 야, 대충해라..” 라며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기를 수 차례 되풀이하다 결국 포기했다.
딸과 실갱이 하느라 시험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고 지낸 한 달. 남아공 고3들이 그렇게도 고대한 환상의 매트릭 볼이
시작됐다.
댄스 파티가 있기 전 before 파티를 좁은 우리 집에서 열기로 했었는데 큰 저택의 현지인 친구 집으로 변경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우아하고 근사하게 준비한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트릭 볼을 잘 모르는 내가 했더라면 아무래도
초라했을 것이다.
멋진 비포파티 분위기에 압도돼 다과를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30~40분이 지났다. 각자 자녀의 커플을 모시고 이동할
시간이었다. 나도 딸의 커플을 모시고 움직였다. 마치 웨딩홀에 가기 전, 양쪽 집안 인사와 가족 상견례라도 하는 듯하다.
본격적인 웨딩을 위해 웨딩마차를 타고 가는, 약간은 들떠 있는 그 기분이다. 약 10분 거리에 있는 댄스 파티 장소
KELVEN 에 도착했다. 많은 차들로 복새통을 이루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름다운 커플들이 손을 잡고 레드 카펫 위를 밟기 위해 순서를
대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레드 카펫 위를 밟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연인들의 떨림을 그제서야 느껴졌다.
수 백명이 앞에서 진을 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와 플래쉬를 들이댄다. 한국에서 열리는 영화제와 같다. 멋진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미소와 핸드백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파트너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내리는 커플들을 보는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에 찬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매트릭 커플들은 마치, 오스카상을 받기 위해 서 있는듯, 영화의 주인공이 카메라 기자들 앞에 포즈를 취하듯 타이 정장을
한 남자 친구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미소도 짓는다. 차량이 속속 들어오는대로 유명배우를 모시기 위해 준비된 검은 정장의 요원들이 에스코트하며
승용차의 문을 열고 닫아주며 시중을 들었다.
매트릭 파티를 처음 보는 나로선 놀라움에 넋이 나갈 정도였다.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구경했다. 카메라가 없어서
한탄이 절로 나왔던 같다. 홀안은 부모는 입장 불가였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평생에 한번 레드카펫 위를 걷는 내 딸의 모습을 찍을 수가
없다니...
전통적인 영국풍의 댄스 파티 문화의 한 면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아름답고 멋지게 치장한 것을 보노라니 우리 딸의
치장이 절대 사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날은 미인이 아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 큰 딸도 정말 아름답게 보인 최고의
날이었다.
남편 없이 혼자 보기가 너무나도 아까운 매트릭 댄스. 집에서만 보던 마냥 천진난만,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이제는 사랑도
하고 결혼할 숙녀가 되는 나이로구나..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오후 4시에 비포 파티로 시작돼 저녁 8시에 댄스 파티가 이어지고 자정까지 많은 커플들과 함께 즐긴 후 다시
애프터(after) 장소로 이동한다.
매트릭 댄스를 마치고 편안한 캐쥬얼 복장에 힐을 굽 낮은 구두로 바꿔 신고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신부가 웨딩을 마치고
피로연(披露宴)을 하기 위해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 입는 것 같다. 덕분에 부모들도 그 날은 잠을 포기해야 한다. 파티가 끝나는 것은 새벽 4시.
환상의 매트릭 볼이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매트릭 볼을 보기 전만 해도, 호들갑스러운 파티 준비로 거부감이 많았지만 그 날 이후 마음이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에
한번 남을 고등학교 시절에 교복을 벗고 마음껏 멋을 부리고 끼를 발산하는 한때의 즐거움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게 되었다.
유년 시절 가졌던 미스코리아의 꿈을, 배우처럼 레드카펫 위를 걷는 그 기분을, 신부가 원하는 드레스를 입고 결혼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멋진 남성과 팔짱을 낀 채.. 우아하게 무대를 걷는 상상을…가상이 아닌 현실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꿈이 아닌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위해 얼마나 정열과 시간, 투자를 했던가.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앞에서 스스로 디자인 한 드레스를 입고, 혹은
직접 고른 드레스를 입고 원하는 포즈를 취해 보는 것도… 정말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번의 웨딩보다 더
값진 매트릭 볼이 아닐까.
완숙한 신부화장보다 막 피어난 개나리꽃 미소와 고사리 손길로 치장한 풋내기 멋쟁이들이 벌이는 한판의 파티. 성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출발하기 전, 모든 것을 본인이 기획, 디자인하는 예행 연습을 해본 것이다.
숨겨졌던 봉오리가 화사하고 아름답게 활짝 피는 것처럼 어떤 언어도 표현하기 힘든 잔치였다. 그동안 아이들을 양육하며 앞만
보고 살아왔던 힘든 시간이 기쁨과 보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매트릭 볼, 돈과 시간이 투자될지언정 정말 한번 해 볼만한 파티다. 시험 성적은 비록 많이 떨어졌지만, 다시 올 수 없는
청춘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고3이라는 부담스러운 틀안이었지만 고3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매트릭 볼이다. 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화의
한 면에 다시 한번 부러움을 금치 못한다.
사치와 멋에 인색한 내게도 매트릭 볼은 진정 멋진 한판의 파티무대로 기억에 남을 것같다. 고3의 딸과 아들이 매트릭
파티에 시간과 정열과 치장, 끼를 마음껏 쏟아붓는 심정을 조금은 알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