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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무덤(허광)’ 장기풍은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으로 15년 간 재직 후 은퇴하여 지금은 방랑여행과 글쓰기로 소일하고 있다. 미국 46개주와 캐나다 10개주 멕시코 쿠바 에콰도르 및 이탈리아 네덜란드를 배낭여행했다. 특히 원주민지역 문화와 생활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 2014년 봄에 70일간 조국을 배낭여행했고 2017년 가을엔 45일간 울릉도와 남해안 도서를 배낭여행했다.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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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 수난사(下)

뉴잉글랜드의 가을(8)
글쓴이 : 장기풍 날짜 : 2020-12-16 (수) 19:19:33

뉴잉글랜드의 가을(8)

"하느님 앞세워 원주민 학살"

북미주 첫 유럽인 노르웨이 에릭슨

 

 

북미주에 유럽인이 처음 상륙한 것은 노르웨이 탐험가 라이프 에릭손(Lief Eriksson)이다. 그는 콜럼버스보다 5백년이나 앞선 서기 1000년 경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세인트 앤서니 인근의 노르웨이 정착지 유적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앞서 986년 다른 노르웨이인 비온 헤리욜프손(Bjarni Herjolfsson)도 이 부근에 상륙하여 잠시 머물렀으나 정착촌을 세운 것은 아니다. 몇 년 뒤 그린랜드에 살던 노르웨이인 토르핀 칼세피니(Thorfinn Karlsefni)도 뉴펀들랜드에 정착촌을 세우고 2년동안 살았다. 986년부터 1011년 사이에 걸친 노르웨이인들의 다섯 차례의 아메리카 탐험이야기는 아이슬란드에서 서사시(敍事詩) 형태로 전해진다. 또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지와 유물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노르웨이 개척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영구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노르웨이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을 비열한 놈또는 난장이로 해석되는 스크렐링’(Skrelings)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원주민들은 낯선 이방인들이 자기네 어장에서 마구잡이로 고기를 포획하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럽에서 최고급 어종으로 취급되는 대구‘(Code)가 아메리카 동북부에는 무진장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원주민들이 노르웨이 정착촌을 공격하자 노르웨이 임산부가 벌거벗은 젖가슴으로 원주민의 칼을 받아 오히려 원주민들이 혼비백산하여 자기네 배로 달아났다고 한다. 마크 클란스키는 그의 저서 대구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이 다섯 차례 아메리카 탐험동안 추운 겨울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대구를 나무껍질처럼 바싹 말려 보존하는 법을 터득해 이를 껌처럼 씹어 필요한 에너지를 섭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보다 훨씬 앞선 9세기 경 세인트 브랜던이라는 사람이 이끈 아일랜드 탐험대가 커럭스라는 작은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다고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이렇듯 북미주는 콜럼버스 훨씬 이전부터 유럽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이다.

 

그런데 콜럼버스 이후 중남미에서 가톨릭교회를 앞세운 스페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학살했다면 북미대륙 특히 미국에서는 영국에서 온 청교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착을 도와 준 원주민들의 은혜를 배신하고 그들이 수만 년 살아 온 삶의 터전을 빼앗고 토속종교와 문화를 말살했다. 이에 비해 영국에 앞서 캐나다에 진출한 프랑스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을 비버 모피교역 대상으로 삼아 공존했다. 이 같은 차이는 비옥한 농경지가 많은 미국에 비해 토지보다는 모피교역이 목적이던 캐나다 지역에서는 원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교도들과 달리 프랑스 개척자들은 교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자체적으로 식민지를 경영할 능력이 없었던 프랑스 정부는 새로 식민지로 삼은 캐나다 동부의 광대한 뉴 프랑스지역의 30%를 가톨릭교회에 기증해 관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신대륙에 많은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이들은 원주민들을 상대로 평화스럽게 전교했다.

 

유럽인들이 오기 전 캐나다에는 이누이트족(에스키모족)과 이로쿠아, 알공퀸족을 비롯한 14개 원주민부족이 광활한 대륙에 퍼져 있었다. 북극에 가까운 극지대와 동서 해안가에 소규모적으로 산재한 부족들은 미국과 달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 때문에 대부분 사냥과 어업에 종사했으며 인구도 최대 2-30만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농업은 8세기경부터 조금씩 시작되어 14세기 경 이로쿠아 부족이 세인트 로렌스 강변지역에 옥수수, 해바라기, 콩 등을 재배했다. 현재 캐나다 원주민 수는 약 140만으로 3개 자치주(준주)를 이루어 그들만의 고도의 자치를 누리며 살고 있다. 미국의 원주민 보호구역과는 개념부터 다르다. 백인 상륙이후 인구가 급감한 미국과 중남미에 비하면 제대로 종족을 보존해 온 셈이다.

 

항해술이 급격히 발달한 15세기부터 대구잡이를 목적으로 유럽 어민들의 북미대륙 왕래가 빈번해졌다. 그러나 어민들은 대구의 황금어장인 이 지역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자신들만의 비밀을 지켰다. 당시 대구는 유럽에서 최고급 어종으로 비싸게 거래되었다.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이 신대륙을 노략질해 많은 이익을 보자 유럽 열강들은 비로소 신대륙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16세기 들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해양 국가들은 다투어 식민지개척에 나섰다. 특히 캐나다가 주 서식처인 비버 모피는 당시 유럽 상류층의 상징인 모자를 비롯하여 코트의 재료로 귀족들에게 인기가 높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할을 했다.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트리에는 1534624일 가스페 반도에 십자가를 꽂고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의 이름으로 이 일대를 프랑스 영토로 선언했다. 그는 계속 강을 거슬러 올라 810일 성 로렌스(라우렌시오) 축일에 선상에서 사제와 함께 감사미사를 드린 후 강의 명칭을 세인트 로렌스로 명명했다. 프랑스는 1541년 식민지 건설책임자를 임명하고 최초의 정착지를 만들었지만 불확실한 모험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를 꺼려 한동안 탐험대를 파견하지 않았고 어민들만 대구잡이와 고래사냥을 위해 거주하면서 원주민들과 모피와 쇠붙이들을 교역했다. 모피교역이 수지가 맞자 프랑스는 16세기 들어 다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졌다.

 

1605년에는 노바스코샤와 메인을 비롯한 아카디아 지역에 프랑스인들의 소규모 정착이 이루어졌고 1608년 샹플레인이 퀘벡에 도착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은 1600년 대 중반 뉴 프랑스사 설립 때 이루어졌다. 프랑스는 대서양에서 현재 퀘백주와 온타리오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뉴 프랑스로 선포했으나 본토보다도 훨씬 거대한 신대륙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가톨릭교회에 뉴 프랑스 전체의 30%에 해당하는 넓고 가치 있는 지역을 제공하여 선교를 겸한 관리를 위탁했다. 1627년 사무엘 드 샹플레인은 리슐리에 추기경으로부터 식민지개척 회사를 운영할 권리를 얻어 뉴 프랑스사를 설립했다. 즉 회사가 모피사업과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대신 아카디아, 퀘벡, 뉴펀들랜드, 루이지아나 등 뉴 프랑스 지역 정착을 지원하고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당초 계약에는 4천명의 정착민을 15년에 걸쳐 들여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회사는 이런 조건을 무시하고 이익이 많은 모피교역에만 집중해 1640년까지 3백 명의 정착민만 들여왔다. 이에 따라 프랑스 남자들과 원주민 여자와의 혼혈이 급증했다. 이런 현상은 백인들이 미국과 중남미처럼 원주민을 말살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불어 사는 토대가 된다.

 

원주민과 결혼한 프랑스 정착민들 입장에서는 원주민들이 처가인 셈이다. 프랑스인들이 개척한 캐나다는 후에 진출한 영국과 2세기 동안 여러 차례 전쟁 끝에 결국 영국이 승리해 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현재는 불어를 사용하는 퀘백 지역만 프랑스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는 원주민들과 연합하여 영국에 맞섰지만 워낙 정착민 인구의 열세로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이어 캐나다를 통치하게 된 영국도 미국에서처럼 원주민을 학살하는 대신 공존하는 방식을 취했다. 모피교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주민의 협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 쪽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디 브라운이 저술한 미국원주민 멸망사 운디드니에 나를 묻어주오에는 19세기 말까지 미국에서 자행된 40여 개 원주민 부족들에 대한 인종말살(人種抹殺) 전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아리조나, 타코다, 캐롤라이나 등 미국 전역에서 원주민들을 조상대대로 살아 온 고향에서 강제로 쫓아내 터전을 뺏고 척박한 땅에 보호구역을 만들어 때로는 수천 마일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을 강요했다. 캐나다 국경 인근의 원주민들은 자유지대인 캐나다로 탈출해 캐나다 원주민들의 보호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자신들의 고향에서 강제로 축출되었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미국 원주민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겨우 멸종을 피한 후손들이다.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jpg

 

나는 작년 2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40일 동안 애리조나 원주민 나호비족과 호피족 자치구역을 여행했다. 그곳은 고원지대의 건조하고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나호비족도 19세기 말 지하자원을 탐낸 백인과 연방군의 공격을 받아 끝까지 산악동굴에 은거하여 저항했으나 겨울철 봉쇄작전으로 아사(餓死) 직전에 이르자 할 수 없이 투항했다. 이들은 8백 마일에 이르는 죽음의 행진 끝에 뉴멕시코주로 이주되었다. 미국정부는 이곳에 천막촌을 꾸미고 대대로 목축과 사냥을 생업으로 삼아 온 이들에게 척박한 땅에서 농작물을 경작하라고 강요했다. 그곳에서도 끊임없이 항쟁이 계속되고 워낙 많은 원주민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자 토벌책임자 셔먼 장군은 원주민들 요구대로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5만 명이 넘던 원주민들은 고작 8천 명 정도만 살아 귀환했다. 현재 나호비족은 25만 명의 인구로 자치구역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많은 유적지와 당시 유물들을 보면서 불굴의 저항정신과 생존본능에 깊은 경외감을 느꼈다.

 

백인들은 선교를 명분으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짓고 자기들의 침략행위를 개척문명화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3백년에 걸쳐 유럽의 네 배가 넘는 광대한 토지와 자원을 강탈했다. 기독교인들이 남북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수천만을 학살해 땅을 빼앗고도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데도 원인이 있다. 그들은 신명기 13장의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꾀는 사람을 돌로 쳐 죽여라는 구절을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원주민 학살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특히 청교도들은 하느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들과 멸망할 사람을 이미 창세 이전에 예정해 놓으셨다는 구원예정설의 칼뱅주의 신학을 신봉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원주민들이야말로 멸망이 예정된 족속이니 이들을 학살하는데 죄의식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원주민을 단순히 이교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도, 영혼도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특히 청교도 목사들이 앞장서 이러한 종교적인 독선을 신자들에게 주입시켰다. 이들은 원주민을 사탄의 자식들로 매도하고 그들을 몰살시키고 땅을 차지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보아도 당연하다고 가르쳤다. 이들에 의해 심어진 청교도 사상이 미국 개척정신의 토대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종교적인 신념으로 원주민을 토벌하면서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개척해 나갔다.

 

미국 제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자유와 문명과 종교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이 서진(西進)하는 찬란한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숲 속에 사는 야만인들의 숲과 강과 땅을 빼앗은 것은 당연지사이다."라고 연설했다. 17세기 청교도인 린 S 러브의 묘비에는 "한평생 그는 주께서 그의 손에 부치신 인디언 98명을 죽였다. 그는 삶이 끝나 그의 본향에서 주의 팔에 안겨 잠들기 전에 100명을 채우길 바랐다."고 새겨져 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1703년 자신들의 의회 결정으로 원주민 머리가죽 1장이나 포로 1명에 40파운드 상금을 걸었고 1720년에는 상금을 100파운드로 올렸다. 기독교 신학자 하위트(W. Howitt)"이른바 기독교 인종이 정복했던 세계 도처에서 모든 주민들에게 자행한 야만과 잔인한 행위는 어떤 역사적 시기에도 그 유례가 없으며, 또 아무리 난폭하고 몽매하며 무정하고 파렴치한 인종도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고 개탄했다. 매사추세츠 해안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해안의 성자'라고 자칭했다. 자칭 성자들은 은인이었던 왐파노그 족과 주변의 원주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스틱 리버 강 하구에 사는 피쿼트 족 마을을 공격했다. 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 7백 명 대부분을 학살했다. 포로로 잡힌 남자는 서인도 제도에 노예로 팔았고 여자들은 병사들이 나누어 강간했다. 청교도들이 처음 상륙한 플리머스에서는 개종을 거부하는 원주민들을 사형에 처했다. 청교도 목사 코튼 매더는 "인디언들은 불에 구워졌으며 흐르는 피의 강물이 마침내 불길을 껐다. 고약한 냄새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승리의 달콤한 희생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기록했다. 보스턴 청교도들은 광활한 농토를 차지하려고 무력으로 원주민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는 오늘 6백 명의 이교도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며 하느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원주민들에게 토지는 물이나 공기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동의 것으로 수만 년을 살아 왔다. 땅이 어느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누구든지 땅이 필요하면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곳을 찾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땅이 필요하다고 하면 서슴없이 양보하고 빌려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백인들이 땅에 울타리를 쳐놓고 그곳을 드나들 수도 없게 만들고 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게 만들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의 토지에 대한 개념을 알게 된 청교도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그들의 토지를 늘려나갔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찾아가 자신들이 만든 토지권리 양도증서를 불쑥 내밀고 내용도 모르는 원주민에게 X표 서명을 받았다. 원주민들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리 없었다.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이 항의하면 백인들의 시민재판에 회부되어 합법적(?)으로 처형되었다. 청교도들은 과연 문명인들답게 모든 것을 법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에 처음으로 토지의 사유제도를 들여와 3백년 가까이 원주민들 땅을 빼앗고 저항하면 학살했다. 애리조나의 나호비족과 아파치족 등 많은 원주민들은 이러한 백인들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18901229일 사우스타코다주 운디드니에서 수우족 3백 명이 연방군의 대포와 총에 의해 집단 학살된 것을 끝으로 3세기에 걸친 원주민들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 백인들의 원주민 침략에는 항상 선교사들이 앞장섰다. 세네카족 추장 사고예와타는 선교사에게 "백인들은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교리를 우리 입에 강제로 처넣으려 한다."고 호통쳤다. 미국에 백인 이주민이 늘어감에 따라 원주민들을 몰아내려는 백인들의 수단도 더욱 악랄해졌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이주민들이 인디언들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영국에서 널리 퍼져 있던 천연두 환자들의 담요를 가져와 면역력이 없는 인디언 주민들에게 선물해 많은 사람을 사망하게 한 사례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원인불명의 병으로 부족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백인들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본 원주민들이 이를 백인들의 저주(咀呪)로 생긴 것으로 오해하여 선의의 목적으로 접근한 선교사를 살해한 일도 있었다.

 

백인들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과 전염병 등으로 1500년 경 1천만 명이 넘던 미국 원주민 인구가 1900년에는 25만 명으로 줄었다. 전멸수준인 것이다. 2006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미국 원주민은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포함하여 4백만 정도이다. 이는 20세기 들어 높은 출산율과 의학발전으로 급증한 것이다. 백인들과의 혼혈이 많은 중남미와 캐나다와 달리 미국 원주민 혼혈은 매우 적은 편이다. 이는 원주민과 공존하려기보다 말살하려 했던 청교도들의 배타적인 정책이 주요원인이다. 원주민들은 청교도들이 초기에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어 곤경에 빠졌을 때 식량과 가죽 등 먹고 입을 것을 갖다 주며 온정의 손길을 폈다. 이때 청교도들은 감격에 넘쳐 원주민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신대륙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자 끝없는 토지욕에 불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청교도들은 돌변하여 원주민들을 사탄의 자식들로 낙인찍고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원주민들은 1928년 시민권을 얻었다. 현재 원주민은 혼혈을 포함 미국인구의 2% 미만이며 1백만 명 이상이 보호구역에 거주한다. 원주민 실업률은 80% 이상이고 1인당 소득은 정부보조금을 합쳐 6천 불 정도로 미국평균의 20% 정도이다. 또한 평균수명도 50세 정도로 아프리카 저개발국 수준이다. 오랜 기간 인종청소를 당한 민족의 슬픈 자화상(自畵像)이다. 원주민보호구역은 연방정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자치법을 유지할 수 있다. 다만 원주민들은 연방정부 투표자격이 없고 투표하려면 원주민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많은 보호구역에서 카지노를 운영하고 있지만 뜯기는 데가 많아 원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순수익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은 보호구역에 카지노를 유치하기 위해 열심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보호구역 남자 대부분이 술과 마약에 젖었고 폭력이 다반사였으나 카지노 유치 후에는 실업률이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미국의 원주민 학살은 최근까지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정부는 2010520일 비로소 원주민에 대한 전쟁과 폭력행위 등 잘못된 정책에 대해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또한 정부는 원주민보호구역이 빈곤과 질병, 보호로부터 방치된 것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함께 의회 결의안에 따라 원주민들의 자체 권한이 확대되었다. 특히 교과서 개정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올바르게 반영하기로 했다. 할리우드 영화계도 그동안 존 웨인, 켈리쿠퍼 등으로 상징되는 서부영화를 통해 원주민들이 무고한 백인을 죽여 머리 가죽을 벗기는 등 호전적인 모습으로 왜곡시켜 왔던 것을 시정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최근에는 예전 스타일의 서부영화는 자취를 감추고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정화의식으로 사용하던 담배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만병의 근원인 담배야말로 백인들에 대한 원주민들의 유일한 복수라는 농담도 있다.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우리의 가슴에 당신의 이름을 좋게 기억하게 하시고, 모든 부족의 추장이 되어 주시고, 위쪽에 있는 당신의 나라처럼 우리 부족도 그렇게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날마다 먹을 양식을 주옵시고, 얼굴 흰 자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수많은 죄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가 잘못한 것도 더 이상 기억하지 마소서. 모든 악의 무리들을 우리로부터 멀리 내던지소서.” (치누크족의 주기도문)

(2014.11.23 뉴욕 虛壙)

 

 

@ 이번 글로 뉴 잉글랜드의 가을연재를 마칩니다. 인류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미국 원주민 수난사는 너무 방대하여 짧은 칼럼에 대충이라도 소개하는 것이 무리입니다. 따라서 북미주 원주민 역사에 대해 흥미 있는 분들을 위해 다음의 책들을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글을 쓰는데 적지 않게 도움을 받은 책들이기도 합니다. ‘인디언의 복음’(어니스트 시튼)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유시화) ‘원주민 멸망사. 운디드니에 나를 묻어주오’(디 브라운)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케네스 데이비스) ‘살아있는 미국역사‘(하워드 진) 이밖에도 미국과 캐나다의 각 원주민 보호구역마다 그들 역사에 대한 짧막한 안내책자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저의 부족한 글에 보내주신 벗님들의 격려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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