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데이 유감
가을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글로벌웹진‘ 뉴스로가 장기풍 칼럼니스트의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8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장기풍 님이 지난 2014년 가을 미국의 초기 역사가 숨쉬고 있는 뉴잉글랜드 지역을 여행하면서 정리한 수상록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뉴잉글랜드의 가을 (1)
콜럼버스데이 유감
매년 10월 둘째 월요일은 미국의 콜럼버스데이다. 모든 은행과 학교, 관공서들이 이날 휴무한다. 이날은 522년 전 이태리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가 세 척의 에스파냐 함대를 이끌고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 과나하니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백인들은 이날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날이라며 대대적으로 기리고 있다. 또한 미국 교과서에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영웅(英雄)으로 묘사되어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정체불명의 일화도 ‘발상의 전환’ 대명사처럼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도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한국 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대부분 동양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인류역사의 왜곡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인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사실이다. 그는 인류역사에 긍정적인 업적을 남긴 영웅이 아니다. 부와 명예욕에 불탄 모험가인 그는 거대한 대륙의 무고한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했으며 살아남은 원주민들을 자손대대 빈곤과 억압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초를 제공한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는 백인들의 일방적 논리에 따른 그들만의 축제인 것이다. 원주민들에게는 원한 맺힌 날이며 우리네 동양 이민자들도 기꺼이 동참하여 기념할 축일은 아닌 것이다.
콜럼버스는 처음 포르투칼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발길을 에스파냐로 돌렸다. 그는 에스파냐의 공동 통치자인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 부부에게 만일 자신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할 경우 자신에게 기사와 제독 작위를 수여하고 발견한 땅을 통치하는 총독의 지위를 부여할 것과 이를 통해 얻은 모든 수익의 10분의 1을 달라고 요구했다. 에스파냐 통치자들은 처음 이 제안을 일축했으나 당시 새로운 선교지가 필요했던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설득으로 이를 수락하고 그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는 동시에 2척의 선박과 전과자들의 죄를 사면해 준다는 조건으로 모집한 승무원들까지 딸려주었다.
6년 간의 준비 끝에 그가 1492년 8월 3일 팔로스항을 출발할 때는 필손이라는 선장이 자신의 산타마리아호를 끌고 합류해 모두 세 척의 함대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탐험을 시작한 것은 후대에 미화된 것처럼 기독교 선교의 사명이나 미지 세계에 대한 순수한 동경이나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그는 오직 인도로 가는 항로개척에 따른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와 금과 은 등 보물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제로 콜럼버스 자신이 기록한 항해일지에는 보물에 대한 언급이 무려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그가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인 과나하니섬에 도착한 후 곧이어 쿠바와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상륙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원주민들로부터 금제품을 약탈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항해도중 부서진 산타마리아호 선원 40명을 현지에 식민지 관리라는 명목으로 남겨둔 채 그해 12월 귀국하여 이사벨 여왕에게 자신이 약탈한 금제품을 바치고 당초 계약대로 새로 발견된 신세계를 통치하는 부왕(副王)에 임명되었다.
그는 다음 해 곧바로 17척 대선단에 1200명으로 구성된 2차 항해를 지휘하여 쿠바, 아이티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원주민을 노예로 부렸다. 처음 남겨두었던 40명은 모두 전멸한 상태였다. 콜럼버스는 금 채굴이 여의치 않자 원주민을 대량으로 에스파냐에 노예로 보냈다. 콜럼버스가 네 차례에 걸쳐 원정하는 동안 그와 그의 부하들은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인디오들에 대한 집단학살 정책을 폈다. 원주민들에게 일정량의 금을 가져오게 하고 적게 가져오면 수족을 자르고 살해했다. 또한 유럽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그가 상륙했던 히스파니올라 지역의 타이노 원주민은 25만 명(80만 명이라는 기록도 있음)이었으나 2년 후에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60년 후에는 수백 명만 생존했고 백년 후에는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콜럼버스는 1506년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상륙한 신대륙을 인도로 확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있는 서남아시아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3차 항해에는 그곳에서 사용할 것으로 예상한 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들을 데리고 갔다. 콜럼버스는 지금의 베네수엘라와 콜럼비아 국경을 흐르는 오리노코강 하구를 발견하고도 하느님의 명령으로 불검을 들고 에덴동산을 지키고 있을 케루핌 천사들이 두려워 감히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했다.
어쨌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은 백인들이 지어낸 인류역사상 최대의 거짓말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에 상륙할 당시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는 2천만 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나름대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살고 있었다. 잉카와 마야, 아즈텍 문명이 대표적이다.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전부 빙하기에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 온 우리와 같은 몽골로이드 종족이라는 학설이 유력했으나 최근 DNA 분석을 통해 최소 3만 년 전부터 베링해협 뿐 아니라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안 계통의 민족 그리고 북대서양을 통한 유럽인종과 남대서양을 통한 아프리카 인종 등 다양한 경로로 다수의 인종이 혼합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몽골로이드가 절대다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실제로 얼마 전 캐나다 학자들의 연구결과도 이들이 우리민족과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기념하는 것은 원주민을 아예 인간의 범주에 넣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인 가운데 처음으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도 틀린 이야기이다. 이미 8세기부터 유럽의 바이킹족이 캐나다 뉴파운드랜드 지역에 정착촌을 세우고 고기잡이를 해 온 것도 현재 보존된 유적지들이 증명하고 있다. 또한 중세기에 들어서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어민들이 캐나다와 메인 동쪽 해안에 수시로 드나들며 대구 등 고기잡이해 온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문서로 된 기록만 없었을 뿐이다. 유럽인들은 콜럼버스 이전부터 캐나다와 미국 원주민들과 교류해 왔다. 1621년 3월 16일 그 전 해 혹독한 겨울을 메이플라워 배안에서 보내고 살아남은 백인들이 프리머스에 상륙해 정착촌을 건설했을 때 가장 먼저 마을을 방문한 원주민은 아베나키 부족 추장 사모세트로 그는 서투른 영어로 "Welcome! Englishman"라고 말을 건네고 자신은 대추장의 특사로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다음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원주민 스콴토를 데리고 와서 백인들의 사정을 살피고 도와줄 것을 조사한 후 돌아갔다. 이렇게 원주민들 가운데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것은 일찍부터 백인들과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스콴토는 여러 해 전 백인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갔으나 가톨릭 신부의 도움으로 풀려나 몇 년 동안 영국에서 살다 탐험대에 편승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사모세트는 미 동해안에 고기잡이를 나온 영국 어부들에게 틈틈이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오래 전 나는 캔사스주 주도(州都) 위치타에 있는 미드 인디언센타를 방문해 그곳 책임자를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체로키족인 책임자는 당시 나에게 콜럼버스데이를 기념일로 정한 1934년 연방정부의 결정을 비난하면서 이는 유사이전부터 미 대륙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백인들만의 자축행사라고 성토했다. 그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는 거짓말과 인디언이라는 용어와 원주민들이 미개하고 폭력적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잉카, 마야를 비롯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현대에 뒤지지 않는 고유 달력과 고도의 수학과 천문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자랑했다. 다만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에 비해 화약과 총포 등 살상무기가 발달하지 못해 그들에 의해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평화를 사랑하고 필요한 것만큼만 사냥하는 원주민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발달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호칭하는 것도 거부한다고 말했다. 인디언은 당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인도로 오인하고 원주민을 인도사람이라고 부른 것인데 5백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바로 잡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들을 체로키, 아파치, 나호비 등 종족 명칭이나 통칭할 경우 원주민(Native)이라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그러면 왜 이곳의 이름이 미드인디언 센터냐고 반문하자 그는 화난 표정으로 이곳에 근무하는 원주민 직원들이 그동안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세기 초반 헐리우드 영화가 미 국민들에게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과 혐오감을 심어주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존 웨인이나 캘리쿠퍼 같은 전설적인 서부활극 주인공들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내 비쳤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체로키 문자로 기록된 주기도문을 나에게 선물했다. 알파베트와 흡사한 85개 음절문자로 구성된 체로키 문자는 1810년 경 만들어진 것으로 백인들에게 자극받아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다.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문화적으로 번성했던 마야, 잉카, 아즈택 문명은 우리가 보기에 석조 피라밋 등 건축물이나 토기 등 생활도구와 인신공양(人身供養) 같은 종교의식은 비슷하지만 말은 제각기 달랐다. 잉카는 매듭으로 문자를 대신했지만 마야는 문법체계를 갖춘 상형문자 형식의 표음문자로 모든 것을 기록해 놓았다. 또한 아즈텍은 표의문자는 있었으나 웬일인지 역사를 기록해 놓지 않았다. 모든 것을 문서로 기록했던 마야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은 1560년 대 에스파냐에서 파견된 프란치스코 수도원장 디에고 데란다(1542-1579) 신부가 마야의 방대한 문서를 전부 소각(燒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는 필사본 4권과 돌에 새겨진 문자들만 남아 있다. 데란다 신부는 마야 원주민들을 보호하려고 했던 훌륭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마야인들이 신성시하는 장소에서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견되자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마야의 우상을 파괴하고 문서를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신앙적인 열성이 방대한 마야 역사의 흔적을 지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저술한 ‘유카탄 유적들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책을 통해 마야 상형문자의 3분의 1 정도를 해독할 수 있는 발음기호를 남겨놓았다. 이 때문에 20세기 후반 들어 속속 발견되는 밀림 속 마야 유적에 남겨진 문자들이 보다 쉽게 해독(解讀)될 수 있게 되었다.
1906년 콜로라도주 공식기념일로 지정된 콜럼버스데이는 1934년 연방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날을 기념일로 여겼다. 1792년 뉴욕과 다른 대도시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3백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다. 1892년에는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이 콜럼버스 데이 4백주년에 국민들에게 단결과 애국심을 호소했다. 또한 1992년 5백주년에는 미국 여러 도시에서 퍼레이드와 다양한 축제가 개최되었다. 이에 앞서 1934년 프랭크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콜럼버스데이를 아예 연방기념일로 선포하고 공휴일로 정했다. 나는 콜럼버스데이가 미 연방정부의 국경일로 제정된 당시의 기록을 보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19세기 중반 청교도의 나라인 미국에 아일랜드와 이태리 등 가톨릭 신자들이 대거 이민하면서 K.K.K단 등 과격한 이민반대 단체들이 생겨났고 이에 맞서 가톨릭교회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톨릭 신자였음을 상기시키고 그가 신대륙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민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을 조직하여 반이민 운동에 맞서는 한편 새 이민자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 가톨릭 이민자들과 콜럼버스 기사단 등의 로비로 콜럼버스데이가 공식 연방공휴일이 된 것이다. 나는 당시 반이민 정서에 맞서 이민자를 보호하려던 가톨릭교회의 노력에는 감사하지만 인류 범죄자인 콜럼버스를 상징으로 내세웠던 것은 아쉽게 생각한다. 1971년부터 10월 둘째 월요일로 변경된 콜럼버스데이는 같은 날 캐나다의 추수감사절로 북미의 양국이 함께 공휴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몇 개 주는 콜럼버스데이를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기업과 증권거래소도 쉬지 않고 있다.
현재 콜럼버스데이는 미국에서 원주민 단체를 중심으로 폐지 또는 ‘원주민의 날‘로 명칭을 변경하자는 요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미국은 백인들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이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는 시정되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 사망한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2002년 콜럼버스 데이를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 공표했다. 그는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것이 150년 간 계속된 인종 학살을 촉발했다며 중남미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콜럼버스 데이는 미국 뿐 아니라 중남미 몇몇 나라에서도 미국의 예를 따라 기념일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b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