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싼 크리스토발에 머물면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을 때 김 선생을 만났다. 58년 개띠인 그는 퇴직하고 1년 동안 울산의 도서관에 파묻혀서 남미 여행을 준비했다. 남미 관련 여행 가이드북은 물론이고 관련된 소설, 시, 수필 등을 모두 讀破(독파)해서 남미 박사 수준이 되었다.
그가 들려 준 파타고니아의 안개 속에 숨어든 유럽의 범죄자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소설은 그의 해석을 통해 원작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게다가 에베레스트 등반을 여러 차례 했던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완벽한 준비와 강철 체력, 기본적인 스페인어 구사, 치밀한 성격과 왕성한 호기심 등 모든 걸 다 갖춘 여행자였다. 김선생은 3개월 간의 남미여행 계획서를 일일 단위로 디테일하게 작성해서 뽑아 왔다.
나는 그 계획서를 보고 졸도 할 뻔 했다.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나는 남미 여행을 꿈꾸고 있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는 펑하고 나타난 산신령 같았다. 난 적토마에 붙어 만리를 가는 쇠파리가 되기로 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함께 남미로 가기로 했다. 김선생은 쿠바로 갔고 나는 개미 꿀단지인 산크리스토발에 남아서 스페인어 공부를 계속 하다가 2018년 1월 14일 콜롬비아의 보고타에 있는 한국 민박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장기 배낭 여행자들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친구가 된다.
김선생이 떠나고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새로운 여행 친구를 따라 과나후아또로 옮겨 스페인어 공부를 계속 했다. 어느 날 뽀글이 머리를 한 30대 초반의 A양이 군대용 도망 빽 보다 더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좋은 인물인데 헤어 스타일이 왜 저런 거야? 아마도 진정한 배낭 여행자가 되기 위해 머리 손질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볶음 머리를 한게 아닐까?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가 문득 인생에 회의가 들어 사표를 내고 퇴직금과 모아 놓은 돈을 탈탈 털어 로망이었던 남미로 튀었다고 했다.
A양이 쿠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멕시코 시티로 떠나던 날 나는 시내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었다. 어두컴컴한 새벽 시간에 여자 혼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서 정류장으로 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려 배웅을 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시내 버스가 오지 않았다. 무작정 기다리다가는 멕시코 시티로 가는 차를 놓칠 게 뻔 했다. 택시를 타야 했는데 A양은 일정에 딱 맞추어 환전한 멕시코 페소가 여유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극구 사양하는 A양에게 억지로 택시비를 쥐어 주어 떠나 보냈다.
콜롬비아의 소금 광산에서 사진을 찍어 주고 있는 사람이 폭탄 머리 A양이다.
내가 약속된 날짜에 콜롬보의 수도인 보고타 시티 외곽에 있는 민박집에 먼저 도착했다. 몇 시간 후에 김선생이 도착 했는데 낯익은 여성과 처음 보는 여성이 뒤따라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은 A양이었다. 오잉 이것이 뭔 일이래?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 했다. 세상이 참 좁구나. 민박집 거실은 순식간에 이산가족 상봉장으로 바뀌었다.
낯선 얼굴은 쿠바에서 합류한 30 후반의 왕 언니 B양이었다. B양은 마른 체구에 하얀 얼굴과 피부색 때문에 처음에는 차가워 보였다. 그녀는 아주 직설적이었지만 포스가 대단해서 군기 반장 노릇도 잘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많고 감성적인 성격의 드러났다. 삼촌들과 동생들을 잘 챙기며 웃음 꽃을 피우게 하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김 선생과 A양 그리고 B양은 쿠바 여행 중에 만나서 다음 행선지가 똑같이 남미라서 동행을 하게 됐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몬세라테 야경
보고타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일행은 세 명이 더 늘어 모두 7명이 되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입영 날짜를 기다리는 C군은 20대 초반의 최강 막내였다. 내가 2년 간 세계일주를 하면서 만난 최연소 한국인 배낭 여행자였다. 어찌나 말과 행동이 톡톡 튀는지 누나들이 세대 차이가 너무 느껴져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외아들이라 부모님이 걱정과 지원이 대단했다. 배낭 여행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성은 거의 따지지 않았다. 가성비의 개념 자체가 달랐다. 그래도 귀여운 짓을 많이 해서 여행 내내 누나와 형과 삼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인기를 독차지 했다.
20대 후반의 듬직한 D군은 군대를 막 제대하고 취업하기 전에 세상을 돌아보겠다고 떠나 왔다. 적은 경비를 겨우 마련해서 무전여행 수준으로 극강의 고난을 감내하고 다녔다. 말 수가 거의 없지만 의지력과 체력은 대단했다.
다른 한 명은 20대 초반의 한 미모하는 별명이 공주님인 E양 이었다. 이른 나이에 스페인어를 배우겠다고 집 떠나서 라틴 아메리카로 왔다. 그리고 우리가 만났을 때는 남미에서도 치안이 최악이라는 온두라스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휴가를 받아서 남미를 돌아보겠다고 왔다가 콜롬비아에서 만났다. 이국적인 마스크에다 완벽하게 현지인 복장과 화장을 하고 다니고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E양은 자국민 무료 입장 관광지에 가면 공짜로 들어가곤 했다.
개성 톡톡 무지개 팀 멤버들
60대 할배 2명에 30대 아가씨 2명 그리고 20대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몰려다니니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처럼 보였지만 우리는 절묘한 팀 웍을 이루어 매일 매일 재미가 찰찰 넘쳤다. 처음에는 호칭 문제가 조금 애매 했지만 바로 삼촌, 조카, 오빠, 언니, 누나, 동생으로 정리 됐다. 지구의 반대편 남미 대륙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7명의 멤버가 나이와 성별, 경험과 취향의 차이를 극복하고 아름답고 환상적인 무지개를 이루었다.
동행자들은 보이지 않는 룰을 잘 지켰다. 첫째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다. 모두가 가는 곳이라도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부담없이 빠질 수 있었다. 낮잠을 자든 카페에 가서 인터넷을 하든 서로 상관하지 않았다. 둘째는 경비 지출은 철저하게 1/N 이었다. 음식점에 가서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문을 하고 더치 페이를 했다. 셋째는 함께 또 따로 였다. 가고 싶은 코스면 동행을 하지만 다른 곳을 가보고 싶으면 언제고 헤어져서 떠났다.
식당에서 즐거운 시간. 주문한 메뉴가 다 다르다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 국경을 넘기 전에 조카들은 사막으로 가서 낙타를 타 보고 밤 하늘의 별을 보고 가겠다며 뒤에 남고, 삼촌 두 명은 원래의 스케줄 대로 국경 도시 포빠얀과 이피알레스를 거쳐 2박 3일 동안 버스를 갈아타며 에콰도르로 먼저 갔다.
국경에서 이미그레이션을 통과 할 때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난민들이 너무 많아서 대기 줄이 엄청 길었다. 최소한 반 나절을 그늘도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서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먼저 통과한 한국인 여행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급행료를 내고 3시간 만에 넘었다. 두 나라 국경에서 브로커에게 각각 20달러 씩 부정한 급행료를 내는 내 생애 최초의 경험을 했다. 배낭 여행자가 이래도 되는걸까? 하는 생각에 착잡하고 씁쓸했다.
며칠 뒤에 뒤 따라온 조카 팀도 몸으로 때우며 버티다가 불볕 더위에 생명이 위태로울 것 같아서 포기하고 급행료를 내고 넘어왔다. 그 와중에 D군 만은 홀로 남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24시간 만에 국경을 넘었다. 그는 진정한 여행 프로였다. 그렇게 우리는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에 있는 민박집에서 다시 만났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국경 다리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나면 외롭지 않고 서로 의지가 되어 좋지만 타인들과는 거의 소통을 하지 못한다. 혼자서 떠나면 외로울 때도 있지만 진정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일상에서는 상상 할 수도 없는 몸과 마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러다 가끔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친구가 되고 색다른 경험과 대화를 하게 된다. 진짜 여행은 볼거리가 아니라 사람이다. 역사적 유적이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그만큼 세상이 넓어진다. 거기다 보태서 우연처럼 만난 인연을 통해 인생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홀로 떠났기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룰 수 있었다.
여행자는 모두가 친구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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